[김홍선의 유럽여행기]과거와 미래의 융합

머니투데이 김홍선 2014.02.22 0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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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디지털 시대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찾다

편집자주 필자는 23년간 IT 분야에서 엔지니어로, 벤처 기업가로, 전문경영인으로서 종사한 IT 전문가다. '누가 미래를 가질 것인가?'라는 저서도 출간했다. 그는 최근 7년간 몸 담았던 안랩의 CEO를 그만 두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인생의 2막을 준비하면서 그는 최근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여행이야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고, 또 전문가들의 여행기도 많다. IT 경영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여행의 단상은 어떨까. 바쁜 일상으로 출장 외에 여유있는 여행을 꿈꿀 수 없는 CEO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쯤으로 시리즈를 연재한다. 여행경로는 로마에서 시작해 나폴리-피렌체-베니스-밀라노-파리까지. 20일간의 여정이다.

로마수도교 근처에서 골프치는 할아버지 /사진=김홍선로마수도교 근처에서 골프치는 할아버지 /사진=김홍선


로마 근교 일정을 마치고 돌아오는데, 어둑어둑해지면서 비가 부슬부슬 온다. 시차도 있고 해서 버스에서 잠깐 졸고 있었는데, 안내자가 마이크를 들고 설명을 시작해서 잠을 깼다. 갑자기 눈 앞에 커다란 돌로 이루어진 유적지가 창 밖으로 보였다. 로마에서 대표적인 공중 목욕탕이었던 카라칼라 욕장이라고 한다.

“역시 로마의 목욕탕은 스케일도 다르구나!”라고 생각을 하면서 그 곳을 지나쳤다.



파바로치를 포함한 3 테너 음악회가 열린 장소이고, 여름에는 오페라가 거행된다고 한다. 2,000년 전 유적을 시내에서 가까이 접하는 것도 신기했는데, 그 안에서 대중 문화 이벤트를 하다니 참으로 운치가 있다. 비록 사람이 많이 모이다 보면 훼손될 수 있어 제약은 있겠지만, 그런 발상을 하는 자체가 신선하다.

버스는 로마 시내의 현대적 건물과 유적지를 번갈아 지나치면서 나아갔다. 거리에 지나다니는 사람들도 아무 거리낌 없어 보인다. 2,000년 전 삶의 공간과 현대 문명의 이기인 자동차가 한 공간에 어우러진게 이국적이다. 보통 유적이라고 하면 멀리 떨어져서 울타리가 쳐있는 단절된 공간이지 않은가? 그런데, 이곳에서는 과거와 현재가 한 공간에서 숨을 쉬고 있다.



로마수도교 근처에서 본 양떼들 /사진=김홍선로마수도교 근처에서 본 양떼들 /사진=김홍선
로마의 수도교는 깨끗한 물을 로마 시내로 끌어오려는 과학적인 의지가 엿보이는 유적이다. 쭉 뻗은 수도교가 로마를 향해 달려가는 광경만 보더라도, 로마의 힘을 느낄 수 있다. 그런데, 이 곳에 가 보면 의외로 여유가 있다. 할아버지들이 수도교 옆 골프장에서 한가하게 골프를 즐기고 있고, 젊은이들은 수도교를 따라서 조깅을 하고 있다. 그 반대편에는 한 무리 양떼가 지나가는 목가(牧歌)적인 풍경이다. 현재의 삶이 2,000년 전 유적과 어울려서 멋진 모습을 만들어 내고 있다.

궁전 구석에 있는 명장의 작품

베끼오 궁전 건물 앞면 모서리에 있는 미켈란젤로 작품 /사진=김홍선베끼오 궁전 건물 앞면 모서리에 있는 미켈란젤로 작품 /사진=김홍선
피렌체의 중심인 시뇨리아 광장에는 베키오 궁전과 우피치 미술관이 나란히 있다. 이 두 곳은 르네상스의 주역이었던 메디치 가문의 소유로서 서로 구름다리로 연결되어 있다. 우피치 미술관으로 들어가는 길목에서 안내하는 분이 갑자기 멈춰 서더니, 궁전 건물 앞문 모서리에 있는 작은 돌을 가리킨다. 벽돌에 웬 사람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누구의 작품인지 아세요?”

그게 유명한 예술가의 작품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았기에 모두 꿀 먹은 벙어리처럼 가만 있었다.

“누가 장난삼아 새긴 것 같지요? 그런데, 놀라지 마세요. 미켈란젤로의 작품이랍니다.”

습작으로 한 것인지, 아니면 부탁을 받고 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 궁전의 모서리에 분명히 작품이 새겨져 있다. 하긴 그 옛날 이 작은 도시에서 미켈란젤로의 손길이 닿은 곳이 한 두 가지였겠는가? 어쨌든 유명 화가의 작품이 무심코 지나치는 길 가에 있다는 자체가 놀라움이었다. 이 작품을 보면서 마치 미켈란젤로가 옆집 아저씨 같은 친근감마저 느껴졌다. 도저히 범접할 수 없는 과거의 위인이 작은 돌 위에 조각해 놓은 작품을 통해 우리와 얘기하고 있는 느낌이다.

이와 같이 이탈리아에서는 유적 주위를 멋있게 치장하기 보다, 유적을 우리의 삶과 어울리게 해 주는 자연스러움이 돋보였다. 사실 우리 나라에도 좋은 유적이 많다. 그러나, 그 속에서 재미있는 스토리를 만들어 내고, 주위와 어울리게 하는 방법은 더 배워야 한다고 생각한다.

어떤 분은 우리의 여행 문화의 문제점을 지적하기도 한다.

“우리는 찾아서 보는 것에만 집착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마치 숙제를 하듯이 이곳 저곳 인증샷 찍는 의무감에 쫓긴다. 다른 사람을 불편하게 하면서까지 사진을 찍으려는 모습은 안쓰럽기까지 하다.

단테의 생가 (피렌체) /사진=김홍선단테의 생가 (피렌체) /사진=김홍선
바티칸의 ‘천지 창조’의 전시 공간에서는 사진 촬영이 엄격하게 금지되어 있다. 프레스코화는 민감하기 때문에 보호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한때 젊은이들 사이에서는 몰래 사진을 찍어서 인터넷에 올리는 커뮤니티까지 있었다고 한다. 왜 조금이라도 더 직접 눈으로 보면서 기억에 남기려고 하지 않고 엉뚱한 경쟁을 하는 걸까?

비싼 돈 주고 여행 갔는데 하나라도 더 보고, 기록하고 싶지 않은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카메라나 동영상, SNS와 같은 디지털 기술은 ‘망각을 사라지게 만드는’ 기록 문화를 만들었다. 게다가 IT는 대중화되어서 돈도 들지 않고, 기술적 어려움도 없다. 누구든지 저렴하게 디지털 문화를 즐기는 세상이 되었다. 그래서, 눈으로 보기 보다 하나라도 카메라에 담기에 바쁘다.

그러나, 역으로 생각하면 어떨까? 때로는 그런 분주함에서 벗어나서 아날로그 스타일로 즐기는 편이 낫다. 미술 작품을 보면서 그 속에 빠져 들고, 과거 인물들이 돌아다녔을 지역을 밟으며 그 시절로 가 보고. 직접 보고 느끼는 체험은 오히려 오랜 기간 생생하게 남아 있다. 카메라의 대중화로 사진 한 장의 가치는 크게 떨어진 반면, 기억 속에 남은 사진은 값을 매길 수 없다.

과거와 현재의 삶의 공간을 아우르는 것도 ‘융합’이다. 누구에게 자랑하기 위해 화려하게 포장된 문화 콘텐츠는 격이 낮다. 그냥 친구처럼 편하게 얘기하고, 과거의 숨결을 현재의 삶에 불어넣을 수 있는 환경이 훨씬 자연스럽다. 그리고, 이를 음미하는 여행은 참으로 매력적이다.

수백 년 전과 같은 모습을 가진 보석 판매점 (피렌체) /사진=김홍선수백 년 전과 같은 모습을 가진 보석 판매점 (피렌체) /사진=김홍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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