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홍선의 유럽여행기]생전 처음 당한 파리의 소매치기

머니투데이 김홍선 2014.02.19 07: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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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현실을 통해 바라본 국경없는 디지털 세계에서 우리가 풀어야 할 과제

편집자주 필자는 23년간 IT 분야에서 엔지니어로, 벤처 기업가로, 전문경영인으로서 종사한 IT 전문가다. '누가 미래를 가질 것인가?'라는 저서도 출간했다. 그는 최근 7년간 몸 담았던 안랩의 CEO를 그만 두고 재충전의 시간을 가지고 있다. 인생의 2막을 준비하면서 그는 최근 유럽 여행을 다녀왔다. 유럽여행이야 더 이상 낯선 단어가 아니고, 또 전문가들의 여행기도 많다. IT 경영인의 시각으로 바라본 여행의 단상은 어떨까. 바쁜 일상으로 출장 외에 여유있는 여행을 꿈꿀 수 없는 CEO들에게 들려주는 이야기쯤으로 시리즈를 연재한다. 여행경로는 로마에서 시작해 나폴리-피렌체-베니스-밀라노-파리까지. 20일간의 여정이다.

프랑스 지하철 입구 /사진=김홍선프랑스 지하철 입구 /사진=김홍선


여행 마지막 날 파리에서의 늦은 오후였다. 시내 일정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가기 위해 지하철을 탔다. 여행 내내 버스와 지하철을 주로 이용했기 때문에, 이미 익숙 해온 터였다. 지하철 문이 열리고 안으로 들어가는데, 갑자기 뒤에서 여학생들이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느 여학생이 나에게 말을 건다. 뒤를 돌아보자, 알아듣지도 못하는 프랑스어로 계속 떠든다.

그러자, 갑자기 옆 의자에 앉아있던 아저씨가 “Hey, Hey” 하면서 나를 황급히 부른다. 그 여자애들에게 뭐라고 소리 지르면서, 나에게는 자기 쪽으로 오라고 손짓한다. 프랑스의 지하철 좌석은 한국의 기차같이 좌석이 배열돼 있어서 설 수 있는 공간이 적다. 약간 비좁지만 그쪽으로 들어섰다. 그 아저씨는 바로 나에게 지갑과 휴대폰을 점검하라고 한다.



순간 ‘아, 소매치기!’라는 생각이 들면서 급히 지갑과 휴대폰을 손으로 더듬거렸다. 다행히 내 점퍼 주머니에 넣은 휴대폰, 바지 주머니에 넣은 지갑은 무사했다. 그런데 내가 메고 있던 작은 손가방이 열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그곳에는 여행 소책자와 여권만 들어있었는데, 여권이 안 보인다. 당황한 표정으로 여권이 없다고 하자 옆에 서 있던 중년 남자가 그 중 한 여자에게서 여권을 받아서 나에게 건네준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나와 떨어진 아내에게 눈빛을 보내니 괜찮다는 표시를 한다. 여기까지가 내가 파리에서 소매치기당한 전모(全貌)다.

유럽 여행에서 소매치기는 다반사다. 지갑과 여권을 잃어버려서, 여권 재발급받으랴 카드 취소하랴, 비행기 놓칠 뻔한 얘기. 렌터카를 잠깐 주차하고 다녀오니 차 안의 가방이 모두 없어진 얘기. 기차에서 졸다가 누가 자기 트렁크를 열려고 해서, 놀라서 눈을 뜨고 쳐다보니 태연히 가더라는 얘기 등 경우도 다양하다.



파리의 명소지만, 조심해야 할 곳 /사진=김홍선파리의 명소지만, 조심해야 할 곳 /사진=김홍선
과거에는 한국에도 소매치기가 많았다. 어린아이들을 훈련해서 고난도의 기술을 구사해서, 버스나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항상 주의해야 했다. 이제는 소매치기 걱정은 별로 하지 않는 사회로 발전했으니 얼마나 다행인가? 그러나 우리보다 잘산다는 유럽의 유명 관광지에서는 소매치기가 여행객 주의사항 1호다.

그래서, 여행 기간 내내 긴장하고 다녔다. 그들의 목적은 현금이라고 해서 돈도 별로 가지고 다니지 않았고, 지갑과 휴대폰은 항상 내 손이 닿는 위치에 가지고 있었다. 별 탈 없이 여행을 마치는가 했는데 여행 마지막 날을 넘기지 못했다. 평생 소매치기를 한 번도 당한 적이 없는 내가 첫 소매치기를 먼 이국땅 파리에서 당할 줄이야.

소매치기 당했던 여권은 바로 찾았으니까 결과적으로 잃어버린 것은 없는 셈이다. 그래도, 처음 겪은 황당한 일이라 그런지 심장이 벌떡벌떡 뛰었다. 생각을 가다듬고 나에게 여권을 찾아준 분에게 물어봤다.


“그런데, 저 애들이 왜 여권을 되돌려 준거지요?”
“이미 여러 사람에게 들켰고, 그러는 사이 문이 닫혀서 도망갈 수가 없어서 그랬나 봅니다. 그리고 여권은 필요가 없었겠지요.”

아마 지하철 문이 열릴 때 재빨리 소매치기해서 문 닫히기 전에 밖으로 도망치는 작전인가 보다. 하마터면 나도 다음 날 비행기 못 탈 뻔했다는 생각을 하니 아찔했다.

슬픈 단상 - 발랄한 소매치기 소녀

그런데, 이해할 수 없는 것은 10대로 보이는 그 여자들의 태도였다. 문이 닫혔으니 어쩔 수 없이 다음 정거장까지 가야 한다. 내 물건을 훔치려다 실패하고 나서, 나와 이를 알아챈 다른 승객들과 한 공간에 같이 있으니 얼마나 어색하겠는가?

그런데 전혀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당당하게 자기들끼리 수다 떨다가 다음 정거장에서 태연스럽게 어울려 나간다. 오히려 피해자인 내가 머쓱해질 정도다. 그냥 보면 영락없이 발랄한 10대 소녀다. 유럽의 소매치기는 죄책감도 없고 뻔뻔스럽다고 하는데 그게 이런 건가?

몽마르뜨 언덕의 트램 정거장. 조심해야 할 곳. /사진=김홍선몽마르뜨 언덕의 트램 정거장. 조심해야 할 곳. /사진=김홍선
그 소녀들이 나가고 나서 아내가 겪었던 상황을 들으면서 같이 복기해 보았다. 지하철 플랫폼으로 들어가는데 학생으로 보이는 애들이 ‘유니언 기(영국국기)’가 그려진 같은 가방을 들고 있었다고 한다.

아내는 ‘이상하다.’ 생각하고 있었는데, 바로 지하철이 도착했다. 지하철에 타자마자 몇 명이 가방을 모두 평평하게 들어 올리더니 그 중 한 명이 아내의 가방을 열려고 했다. 그러나 아내는 가방 여는 부분을 꽉 잡고 있어서 실패했다. 아내가 확 뿌리치면서 쳐다보자 그녀는 아무 일 없었다는 듯이 유유히 돌아서 갔다. 그러던 중 몇 명이 앞서 가던 나에게 달려가는 광경을 보고 ‘저 애들 이상해’라고 소리치려는데, 이미 내가 자리 안쪽으로 피하면서 행동을 멈췄다.

정리해보면, (1) 8-10명의 인원이 두 팀으로 우리 부부를 대상으로 공격했다. (2) 가방을 들어 올린 것은 소매치기하는 손동작을 안 보이게 하려는 의도였다. (3) 사람이 많이 타는 순간 막 떠들면서 정신 줄을 빼놓았다. (4) 아내 가방을 열려고 시도했지만 실패했다. (5) 내 가방을 열고 여권을 가져갔지만, 주위 아저씨들이 소리치는 바람에 더는 나에 대한 공격도 멈췄다. (6) 주위에서 목격한 사람이 달라고 하니까 어쩔 수 없이 여권을 돌려줬다. 사실 돈을 노렸으니 여권은 필요 없었을 것이다. 순식간에 일어난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파리의 세느강변 /사진=김홍선파리의 세느강변 /사진=김홍선
유럽에서 소매치기는 주로 집시(Gypsy)들에 의해 행해진다고 한다. 어릴 때부터 그렇게 교육받았기 때문에 죄책감도 안 느낀다고 한다. 요즈음은 상대적으로 가난한 동유럽 지역에서 건너오는 범법자도 많다고 한다. 그냥 걸어서 국경을 넘어오기 때문에 막는 것도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뻔뻔스러울 정도로 당당했던 그녀들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얼굴도 예쁘장하게 생긴 소녀들이 이런 나쁜 짓을 하다니 가슴이 아팠다. 이 광경을 목격한 승객분이 ‘외국 여행객들에게 미안하고 창피하다.’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국경의 기능이 사라져 간 유럽 대륙. 이것도 개방화된 사회의 역기능인가?

상대적으로 우리나라는 국경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여 있어 범법자의 진입 통제는 비교적 수월하다. 또한, 치안이 잘 되어 있어, 소매치기는 거의 사라졌다. 반면에 파리나 로마 같은 관광지는 늘 소매치기와 같이 살아야 한다. 이것도 다른 문화를 경험하는 여행의 한 페이지였던 셈이다.

‘인셉션’ 영화의 한 장면으로 유명한 세느 강의 다리 /사진=김홍선‘인셉션’ 영화의 한 장면으로 유명한 세느 강의 다리 /사진=김홍선
그런데, 직업 본능이 살아났다. “우리나라에서도 사이버 공간은 국경의 통제가 되지 않는 유럽과 같은 것 아닌가?”

사이버 공간은 국경이 없다. 안팎으로 오가는 쓰레기와 사기, 절도, 협박 행위가 넘쳐난다. 통제라는 것은 애당초 디지털 사회의 개념과 맞지 않는다. 유명 도시에 유럽 전역에서 국경을 넘어오는 범법자들이 넘치는 것과 돈과 정보가 넘치는 IT 서비스에 전 세계에서 해커가 먹잇감을 찾아오는 것은 같은 현상이다.

결국 우리는 이런 어두운 세계와 같이 살아가야 한다. 법과 치안이 막아줄 것이라고 막연히 기대만 해서도 안 된다. 언젠가는 깨끗한 세상이 올 거라고 착각해서도 안 된다. 인간 사회가 그렇게 순진하게 살아가는 세상은 아니다.

그래서, 유럽 사람들은 소매치기나 신체적 위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스스로 노력하고 긴장한다. 한국에서 소매치기 걱정은 안 해도 되지만, 사이버 공간에서는 적어도 유럽인과 같은 생활 자세를 지녀야 한다. 자율과 참여 정신이 절실하다. 국경이 없는 디지털 문명의 세계는 우리가 만들어가야 할 시대적 과제다. 유럽 여행 중 소매치기당했던 경험으로부터 생각해 본 단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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