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사조' 박철순, 年매출 100억中企 CEO되더니…

머니투데이 김하늬 기자 2013.11.29 0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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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당한 부자]<4-1>내년 초 스포츠재단 설립, 유소년지원 확대

↑박철순 전 OB베어스 선수. 현재 스포츠용품회사 알룩스포츠와 LCD용장비제조사 모든테크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이동훈 기자↑박철순 전 OB베어스 선수. 현재 스포츠용품회사 알룩스포츠와 LCD용장비제조사 모든테크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이동훈 기자


"내가 누군지도 잘 모르는 꼬맹이들이 "감독님" 하면서 안기는데 기분이 묘했다. 처음 만났을 땐 움츠리던 아이들이 야구팀 안에서 적극적이고 서로 배려하는 모습을 보면서 가장 큰 보람을 느꼈다."

이제는 수십 년 전 '프로야구 원년의 추억' 속에서만 언급되던 '불사조' 박철순 전 OB베어스 선수가 선수생활 은퇴 15년 만에 다시 야구공을 집어 들었다. 투수로 마운드에 올라 던지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직 공을 잡는 '그립'도 모르는 초등학생들의 고사리같은 손에 쥐어주기 위해서다.



박 전 선수는 프로야구계에서 은퇴한 뒤 현재까지 스포츠용품회사 알룩스포츠와 LCD관련 부품제조로 연매출 100억원을 내 온 중소기업 모든테크의 회장을 역임하고 있다. 그는 "'박 회장'이라는 직함은 아직도 어색하다"며 손사래를 치고, "경영 하면서 내세울 만한 사회공헌은 없다"며 겸손히 물러서지만 은퇴한 야구계 후배들을 남몰래 돕고, 지역사회에 나눔을 실천해 왔다.

그리고 60세가 된 지금, 박 회장은 가정형편이 어려운 아이들을 위한 유소년 야구단과 함께 새롭게 인생의 제 3막을 막 열 준비를 하고 있다. 박 전 선수가 장충동 리틀야구장에서 "플레이 볼"을 외치자 아이들이 야구공을 던지고, 치고, 잡아내며 신나게 뛰고 달린다. 그라운드 위에서 이리 저리 움직이는 공의 궤적은 아이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마음이 되고 사랑이 되고 교육의 끈이 된다.



◇15년 동안 남몰래 이어온 나눔=박 전 선수는 은퇴야구선수협회인 일구회에서 여전히 '큰 형님'으로 불린다. 분기에 한 번 씩 열리는 정기모임에 꾸준히 나가고, 다양한 야구계 행사가 있을 때마다 후배 야구선수들을 위해 수백만원씩 '통 큰' 기부도 아끼지 않았기 때문. 그럴 때 마다 박 전 선수는 "비밀로 해달라"며 말을 아꼈다.

은퇴한 야구선수들이 "형님, 도와주세요"라며 박 전 선수를 찾아오는 일도 많았다. 운동선수가 기업 비즈니스맨으로 변신하는 일은 흔치 않았고, 박 전 선수가 경영에 뛰어든 뒤 3년 만에 알룩스포츠는 매출액이 400% 성장하는 등 성공가도를 이어간 덕분이었다. 그가 매년 알룩스포츠에서 제작한 스포츠용 건강목걸이와 팔찌를 후배들에게 나눠주는 건 일도 아니었다.

"2000년대 후반 들어 회사 상황이 힘들어져 직원들만 월급을 겨우 주던 때도 있었는데, 어느 날 야구계 후배 녀석이 찾아왔다. 자신도 작은 사업을 시작하고 싶은데 도움이 필요하다고 해서 내가 대출 받아서 빌려준 적도 있다."


박 전 선수는 당시를 회상하며 조금은 씁쓸한 미소를 보였다. 그 때 도움을 요청하며 찾아온 많은 후배들 중 지금까지 연락을 주고받는 경우는 거의 없어서다. 그는 "도와주려고 마음을 먹었으면 받을 생각 않고 주는 게 맞다"며 "그 친구들이 어디선가 성공했다는 소식이 들려도 난 생색낼 생각 없다"고 말했다.

박 전 선수는 알룩스포츠와 모든테크를 15년간 경영하면서 "회사가 성장할 수록 가장 첫 번째 나눔 대상은 우리 직원들이다"는 원칙을 실천해왔다. 박 전 선수는 우선 자신의 지갑에서 회사 법인카드 두 장을 꺼내 반납하고 영업팀의 불필요한 접대비를 단번에 줄였다.

박 전 선수는 "그렇게 회사 비용을 줄여서 한 달에 단 돈 10만원이라도 직원들에게 더 주는 게 옳다고 생각했다. 한 달에 120만원 버는 공장 식구들에게 10만원은 큰 돈이니까" 라고 전했다. 그는 우선 함께 일하는 직장 동료들을 챙긴 뒤에야 주변을 살펴보기 시작했다.

◇올해 '유소년야구단' 감독 경험이 내년 '스포츠재단' 설립으로=올해 처음으로 서울시청이 서울시 내 4개 구의 초등학생을 위한 '서울시 어린이 야구교실'을 출범시켰다. 박 전 선수는 이 야구교실의 초대감독이 됐다.

↑지난 10월 열린 '서울시 어린이 야구교실' 의 야구대회에서 박철순 전 OB베어스 선수가 성북구 야구팀 어린이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일구회)↑지난 10월 열린 '서울시 어린이 야구교실' 의 야구대회에서 박철순 전 OB베어스 선수가 성북구 야구팀 어린이들과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사진제공=일구회)
서울시는 성북구, 강북구, 은평구, 강서구 등 4개 지역의 초등학생들 중 가정형편이 어렵거나 결손가정의 아이들을 우선 선발 해 각각 30명씩 총 120명의 아이들을 위한 '야구 학교'를 연 것.

이 야구교실은 지난 4월부터 매주 토요일 장충동 리틀야구장에서 28주 동안 진행됐다. 박 전 선수는 총 감독을 맡고 각 지역별로 프로야구 출신 은퇴선수 3명이 코치를 맡으며 함께 팀을 꾸렸다.

박 전 선수는 "어리기만 해 보이던 초등학생들도 4학년부터 6학년까지 한데 모아놓자 위축돼 있는데 그 안에 자기들끼리 서열도 정하던 모습을 보고 놀랐다"며 "그런데 점차 야구로 '팀플레이'를 하다보니 6학년들은 4학년 동생들을 돌봐주고, 서로 다른 학교에 다니느라 주말만 만나는데도 친해지는 걸 보면서 내가 더 감동을 받았다"고 말했다.

↑지난 10월 열린 '서울시 어린이 야구교실' 야구대회에서 강북구팀 학생들이 득점을 한 뒤 기뻐하며 서로 격려하는 모습(사진제공=일구회) ↑지난 10월 열린 '서울시 어린이 야구교실' 야구대회에서 강북구팀 학생들이 득점을 한 뒤 기뻐하며 서로 격려하는 모습(사진제공=일구회)
아이들의 변화는 운동장뿐만 아니라 교실과 집까지 이어졌다. 학부모들은 "평소에 방에서 컴퓨터만 하던 아이가 "오늘 무슨 일을 했는지 이야기해주겠다"며 먼저 말을 걸고, 자기 물건을 스스로 정리하기 시작했다"며 "생활 태도가 밝아지고 긍정적으로 변했다"는 이야기를 전해왔다.

박 전 선수가 올 한해 아이들과 함께 한 경험을 '스포츠 재단' 설립으로 확대한 건 이 같은 이유들이 쌓여서다.

박 전 선수는 "나는 사실 예전에 누군가의 도움을 받는 건 질색하곤 했다"며 "야구선수 시절, 마운드 위에서 보낸 시간보다 병원 침대에 누워있던 시간이 더 길게 느껴지는데, 부상을 극복하고 다시 일어나기 위해 혼자 이를 악물고 버티는 게 습관처럼 굳어졌던 것 같다"고 회상했다.

하지만 박 전 선수는 "작은 도움으로 아이들의 삶이 긍정적으로 바뀌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내 예전 모습처럼 홀로 고군분투하기보다 함께 극복하는 힘을 주고 싶어졌다"고 말했다.

그는 비단 야구뿐만 아니라 레스링의 심권호선수, 체조의 여홍철 선수 등 함께 할 수 있는 사람들과 뜻을 모아 다양한 스포츠 종목 은퇴선수들이 함께 하는 '스포츠재단' 설립을 준비하고 있다. 재단 설립을 위한 시작 비용은 박 전 선수의 사재를 출연할 계획이다.

그는 "내가 수백억원대 부자는 아니지만 아이들과 꿈을 나누고, 돕고, 함께할 수 있다는 믿음이 있어 마음만은 그 누구보다 부자다"며 "올 겨울, 인생의 세 번째 도전을 위해 '몸을 만들겠다'"고 전했다.

↑박철순 전 OB베어스선수가 '서울시 어린이 야구교실'에 참가한 학생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사진제공=일구회)↑박철순 전 OB베어스선수가 '서울시 어린이 야구교실'에 참가한 학생과 기념사진을 촬영하고 있다(사진제공=일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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