넘치는 의원입법, '창조경제' 실종되다

머니투데이 진상현 기자 2013.09.11 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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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원입법 과잉]규제도 급증…"국회의원 입법권 한계 논의 필요한 때"

"요즘 같아서는 차라리 법안 발의를 안 하는 국회의원이 국익에 도움이 되는 것 같다"(김정호 연세대 경제대학원 특임교수)

"국회의원들의 입법권에도 한계가 존재한다는 것을 전제로 입법권이 어디까지 행사될 것이냐에 대한 논의가 시작돼야 할 시점이다"(국회 사무처 관계자)

올해 정기국회 법안 심사가 곧 시작될 예정인 가운데 급증하고 있는 의원입법이 우리 경제에 찬물을 끼얹고 있다는 우려가 높아지고 있다. 입법 경쟁 속에 양산된 졸속 법안, 포퓰리즘(인기영합주의) 법안 등의 폐해가 현실화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런 부작용들을 계속 방치할 경우 민의 반영의 핵심 경로인 입법 활동 전반에 부정적인 이미지를 덧씌워 국민들의 '법 저항감'을 더욱 키우게 될 것이라는 지적이다.



넘치는 의원입법, '창조경제' 실종되다


10일 국회와 재계에 따르면 최근 산업계의 극심한 반발에 부딪힌 '화학물질 등록 평가 등에 대한 법률(화평법)'은 정부와 국회가 뒤늦게 대안 마련에 부심하고 있다. 이 법안이 지난 4월 국회를 통과한지 5개월여 만이다. 대안 입법을 검토 중인 한 의원실 관계자는 "산업부와 환경부, 이해 관계자 등의 이야기를 종합적으로 들어보고 있다"면서 "시행령에서 보완할 수 있는지, 다시 법안을 제출할 필요가 있는지 볼 것"이라고 말했다. 이 법안은 당초 정부와 산업계가 1년 넘게 준비해 국회에 제출했으나 정의당 심상정 의원이 대표 발의한 의원 입법안이 병합 심사되면서 기업에 부담을 크게 주는 쪽으로 수정됐다.

역시 의원입법으로 발의된 유해화학물질 관리법은 상임위가 아닌 법제사법위원회에서 핵심 내용이 바뀌기도 했다. 유해 화학물질 유출 사고가 발생하면 해당 사업장 매출의 최대 10%를 과징금으로 부과토록 한 것이 과도하다는 지적에 따라 5%로 내린 것. 문구 수정, 다른 법안과의 상충 문제를 주로 보는 법사위에서 주요 내용을 수정한 것은 이례적이다. 그만큼 산업계에 미칠 파장이 크다고 본 것이다.



문제는 이런 법안들이 하나둘이 아니라는 점이다. 의원 발의 법률안이 급증하면서 규제 법안도 함께 늘고 있기 때문이다. 국회 의안 통계에 따르면 의원 발의 법안 수는 지난 14대 때 321건에 불과하던 것이 15대 1144건, 16대 1912건, 17대 6387건, 18대 1만2220건으로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다. 19대 들어 의원 발의 법률안도 회기의 3분의 1 가량이 지난 시점에 이미 6000건을 넘어섰다. 또 전국경제인연합회 집계에 따르면 올해 5월 말 현재 의원 발의 법률안 4590건 중 규제 관련 법률안은 440건에 이른다. 이 중 규제를 신설하거나 강화하는 법인이 81.4%에 달하는 358건이다. 규제가 많아지면 경제 활동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규제 법안 외에도 막대한 재정이 소요되는 법안이 무더기로 발의되는가 하면, 졸속으로 발의되는 일도 적지 않다. 이른바 ‘택시법’으로 불리는 대중교통의 육성 및 이용촉진에 관한 법률 개정안은 지난해 정부뿐 아니라 국민 대다수도 반대 속에도 국회 본회의를 통과했다가 대통령의 거부권 행사로 귀결되기도 했다. 장하나 민주당 의원 등이 주도했던 청년고용촉진법은 혜택의 대상이 되는 청년의 연령을 15~29세로 했다가 30대의 강한 반발에 따라 15~39세로 확대해 한 달 여 만에 재발의 하는 해프닝을 겪었다.

행정부의 권한을 침범하는 사례도 있다. 중앙 정부와 지방자치단체의 무상보육 재원 비중을 규정한 영유아보육법이 대표적인 예다. 국회 사무처 관계자는 "입법 행위가 행정부를 견제할 수는 있지만 영유아보육법은 그 선을 넘어선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정부 발의 법안의 경우에도 유사한 의원 입법안과 병행 심사되면서 내용이 크게 바뀌는 경우도 허다하다.


의원 입법이 이처럼 급증하고 있는 것은 입법권을 가진 국회로 힘이 쏠리면서 각 이혜관계자들로부터 입법 수요가 급증하고 있기 때문이다. 의정 활동에 대한 평가가 발의 법안 수, 통과 법안 수 외에는 뚜렷한 잣대가 없다는 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정부 입법안에 비해 의원 발의안의 입법 절차가 간소한 것도 배경이다. 의원 입법의 경우 정부 입법과 달리 규제와 관련한 심사 등 여러 절차가 생략된다.

부작용이 심화되면서 대안의 필요성을 주장하는 목소리도 커지고 있다. 그냥 방치했다가는 경제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물론 의원들의 입법 활동 전반에 부정적인 인식을 심어줄 수 있다는 지적이다.



홍완식 한국입법학회 회장은 "의원 발의 법안도 정부 법안처럼 어떤 규제에 저촉되는지를 미리 심사하는 과정을 거친다면 과잉 입법을 막고 입법 발의가 규제를 낳는 것을 줄일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 재선 의원은 "법안 발의 건수, 통과법안 수 외에는 의정활동을 평가하는 잣대가 딱히 없다"면서 "좋은 법안, 창의적인 법안을 경우 그런 것을 제대로 부각시켜주는 시스템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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