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정태 칼럼] 남아있는 나날에도 희망은 있다

머니투데이 박정태 경제 칼럼니스트 2013.05.03 10: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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투자의 의미를 찾아서 <31>

[박정태 칼럼] 남아있는 나날에도 희망은 있다


#그녀에게서는 상큼한 레몬향이 풍겼다. 조금 전 내 옆 통로에서 멈춰선 분홍빛 하이힐이 창 쪽으로 방향을 틀더니 노란색 원피스와 어깨에 살짝 걸친 가죽 재킷, 작은 파란색 여행용 가방이 안쪽으로 당겨진 내 무릎을 스치듯 지나갔다.

자리에 앉은 그녀는 곧 투명한 빛깔의 매니큐어가 칠해진 손가락으로 빨간 플라스틱 케이스를 열어 스마트폰을 톡톡 눌러댔다. "저, 방금 전에 기차 출발했어요." 옆자리에 앉은 사람을 의식하기라도 하듯 조용히 간단하게 용건만 말하고는 끊었는데, 앳되지만 약간 허스키한 대단히 매력적인 목소리였다.



#요즘 일주일에 한 번씩 대구에 강의가 있어 내려가는데, 그날 내 머릿속에서는 가브리엘 가르시아 마르케스가 쓴 '잠자는 미녀의 비행기'가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사실 마르케스의 글을 읽었을 때는 별로 실감이 나지 않았었다. 한데 막상 내가 이런 일을 겪게 되다니, 참 오래 살고 볼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르케스는 그때 파리 공항에서 "내 평생 본 가장 멋진 여인"을 만났고, 뉴욕으로 가는 비행기의 옆 좌석에 바로 그 젊은 여성이 앉았던 것이다. 그는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지만, 동화에서나 나올 법한 이 여인은 은은한 향기를 내뿜으며 곧바로 잠에 빠져든다.



#KTX는 점점 속도를 높여가기 시작한다. 하지만 내 옆자리에 앉은 그녀는 잠에 빠져들지 않는다. 창 밖을 응시했다가는 주위를 돌아보고, 가방에서 생수병을 꺼내 물을 한 모금 마실 뿐이다. 나와 눈이 마주치자 살짝 미소까지 지어 보인다. 아직 소녀 티가 채 가시지 않은 그녀는 기껏해야 스물을 갓 넘겼을 것 같다.

멀리 창 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완연한 봄이다. 수줍은 연둣빛으로 잠시 나타났다가는 금방 사라져버리는 계절, 하지만 소녀가 여인으로 성숙해가듯 봄도 곧 진한 초록으로 변해갈 것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의 내 심정은 마르케스가 아니라 가즈오 이시구로의 '남아있는 나날'에 나오는 스티븐스와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영국의 저명한 저택 달링턴 홀의 집사로 평생을 보낸 그는 최고의 집사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왔지만 자신이 최선을 다해 섬겨온 달링턴 경이 나치 지지자였음을 뒤늦게 알게 된다.


인생의 황혼기에 이르러서야 그동안 지켜왔던 명분과 신뢰가 허망하게 무너져 내린 것을 깨닫고, 비로소 지나가버린 인생과 잃어버린 사랑을 떠올리는 스티븐스. 나에게도 스티븐스처럼 아무것도 모르고 외곬으로 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내가 조금만 더 성숙했더라면, 아니 한 번만 더 깊이 생각하고 판단을 내렸더라면 어떻게 됐을까? 그렇게 놓쳐버린 기회들, 황금 같았던 기회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지나고 나서야 후회했지만 앞으로도 얼마든지 그런 기회가 올 것이라고 생각했다. 나에게는 남아있는 시간이 무한히 많다고 여겼던 것이다. 이제 와서 그런 생각을 해봐야 다 부질없고 괜히 마음만 심란해진다.

#스티븐스는 젊은 시절 자신이 포기했던 첫사랑을 찾아 생애 처음으로 여행을 떠나는데,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작은 저택의 집사 출신인 한 노인이 이렇게 조언한다. "만날 그렇게 뒤만 돌아보아선 안 됩니다. 그래요, 우리 둘 다 피 끓는 청춘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그래도 계속 앞을 보고 전진해야 하는 거요."

한 시간도 채 되지 않았는데 어느새 대전이다. 스르르 기차가 멈추는 순간 그녀가 불쑥 일어서더니 서둘러 빠져나간다. 아, 나는 이번에도 그녀가 당연히 대구나 부산쯤 가는 줄 알았다.

#덜컹하며 기차가 다시 움직이더니 느릿느릿하게 플랫폼을 빠져나간다. 창 밖으로는 봄날 오후의 햇빛이 무심하게 쏟아져 내린다. 그녀가 머물렀던, 그래서 아직도 상큼한 레몬향이 남아있는 좌석은 그대로 비어있다.

나는 그 옆자리에서 그녀를 맨 처음 보았을 때 느꼈던 놀라움을 떠올리며 눈을 감는다. 앞으로 한 시간을 더 가야 하는구나, 그런 생각을 하는데 통로 쪽에서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무릎을 안쪽으로 당기며 눈을 뜬다. 창가 쪽 자리로 총총히 발걸음을 옮기는 미니스커트에서는 좀더 진한 향수 냄새가 풍겨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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