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스&팩트]일본부자가 한국부자보다 낫다?

머니투데이 오동희 기자, 서명훈 기자 2013.05.02 06:35
글자크기

기업생태계 유연하다는 해석의 오류… 전쟁史와 산업史를 고려 안한 단순비교 무리

편집자주 보도되는 뉴스(NEWS)는 일반 시청자나 독자들에게는 사실(FACT)로 받아들여지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뉴스가 반드시 팩트가 아닌 경우는 자주 있다. 겉으로 보이는 것만이 진실은 아니기 때문이다. 현장에서 발로 뛰는 머니투데이 베테랑 기자들이 본 '뉴스'와 '팩트'의 차이를 전하고, 뉴스에서 잘못 전달된 팩트를 바로잡고자 한다.

[뉴스&팩트]일본부자가 한국부자보다 낫다?


"기업 역사가 오래된 일본의 기업 생태계가 한국보다 되레 유연하고 진입장벽이 낮아 빠른 순환구조를 갖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30일 모 기업경영평가 사이트가 내놓은 '한일 50대 부호비교' 자료를 거의 원문대로 옮긴 국내 언론들의 보도 내용들이다.

'한국 50대 부자 중 창업기업인 22% 불과…일본은 68%', '한국 주식부자 대부분 재벌 2·3세 출신' 등 독자들의 호기심을 자극하며 '한국 부자에 대한 반감'의 댓글들이 쏟아졌다. 일본 부자들은 자신들의 노력으로 기업을 일궜고, 한국 부자들은 '부모 잘 만나서 부자가 됐다'는 뉘앙스가 주를 이뤘다.



이런 뉴스가 팩트(사실)일까? 한국과 일본 양국의 기업사를 들여다보면 이런 표면적인 사실과는 다른 스토리가 담겨 있다. 일본 부자서열의 핵심, 즉 2차 대전 전후 일본 재벌들의 스토리가 소홀히 다뤄진 측면도 있다.

또 이런 뉴스에는 '창업부자'는 도전정신, '상속부자'는 '불로소득'이라는 이분법적 프레임이 담겨있다. 창업 후 수성의 어려움과 수성과정에서의 기업 가치 상승을 간과한 측면도 엿보인다.



일본 부호 1위인 야나이 다다시 유니클로 회장일본 부호 1위인 야나이 다다시 유니클로 회장
◇日 부자 중 상속이 적은 이유…2차 대전 전범(戰犯) 처리 때문=일본 부자 1위는 글로벌 의류업체 유니클로의 야나이 다다시다. 이 회사는 일본 50대 그룹에도 끼지 못하는 기업이다.

지난해 매출 9287억엔(100엔당 1130.15원, 한화 10조 4957억원 상당)에 영업이익은 1265억엔(1조 4296억원)이다. 삼성전자 매출(201조원)과 영업이익(29조원)과 비교하면 1/20 수준이다.

이런 기업의 창업자가 일본 부자 1위인 이유는 2차대전 패전의 결과와 관련 있다. 이 회사보다 규모가 큰 기업들은 2차 대전 이후 전범기업에 포함돼 오너들의 지분을 모두 분산하고, 그룹을 해체해 창업가문의 지분율이 이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 전쟁비용을 댔던 일본 재벌을 해체해 더 이상 전쟁을 일으키지 못하게 하기 위한 조치였다(일본의 재벌해체 과정과 시사점: 신종익 저).


유니클로의 야나이 회장이 부자 1위인 것은 소유 구조 때문이기도 하다. 야나이 회장은 주력회사인 유니클로의 지분 21.67%를 보유하고 있고, 가족까지 합치면 32.88%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다.

일본은 4대 기업인 미츠이(三井), 미츠비시(三菱), 스미토모(住友), 야쓰다(安田) 등이 여전히 이끌고 있다. 2차 세계대전을 일으켜 아시아 국가들에게 수많은 피해를 입힌 일본의 '자금줄'이었던 이들은 전범기업에 포함돼 1945년 9월 연합군의 일본점령기본방침(Post Surrender Policy For Japan)에 따라 해체가 확정됐다.(일본 재벌의 해체와 소유·지배구조의 변화에 관한 연구, 고경혜 저)



미 군정은 4대 전범기업 등의 지주회사 해산, 자산 동결, 오너들의 지분 강제매각 분산 등을 통해 전쟁의 씨앗이 될 수 있는 일본 재벌을 같은 해 11월에 해체했다. 해체당시 미츠이 그룹 278개사, 미츠비시 189개사, 스미토모 24개사의 계열사를 거느리고 있었다. 이들이 해체되면서 상속이 이뤄지지 못해 큰 기업에는 오너지분이 거의 없다.

현재 일본의 50대 기업 가운데 토요타자동차, NTT도코모, 미츠비시UFJ파이낸셜, 스미토미, 닛산, 히다치, 파나소닉, 도시바 등 웬만한 이름의 톱 기업들은 이들과 같은 전범기업에 속해 대부분의 지분을 분산했다.(이명수 새누리당 국회의원 전범기업 발표)

전후 처리과정에서 전범기업의 보유지분과 계열사의 분산 매각을 거치면서 이들 기업의 오너들은 '부자' 대열에서 대거 빠졌다. 그러다 보니 일본의 톱 50기업 중에 상속부자가 적고, 금융회사나 비금융회사가 대주주인 '법인자본주의' 형태를 띠고 있다. 이는 미 군정 하에서 일본 정부가 일본 기업을 외국인들에게 빼앗기지 않기 위해 의도적으로 기업끼리 실타래로 묶어 놨기 때문이다. 이런 대기업 아래 서열에 있는 그룹의 창업자 개인의 부자비율이 높은 것이다.



일각에서 보도된 것처럼 '기업의 역사가 오래된 일본의 기업 생태계가 한국보다 되레 유연하고 진입장벽이 낮아 빠른 순환구조를 갖춘 것'이라는 해석은 이러한 역사적 배경을 도외시한 잘못된 분석이다.

이건희 삼성전자 회장이건희 삼성전자 회장
◇한·일 부자의 구성…창업보다 수성의 어려움=국내 부자명단 1, 2위는 이건희 삼성전자 (64,200원 ▼500 -0.77%) 회장과 정몽구 현대자동차그룹 회장이다. 이어 정의선 현대차 (254,500원 ▼4,500 -1.74%) 부회장, 서경배 아모레퍼시픽 (152,200원 ▲5,400 +3.68%) 회장, 신동빈 롯데그룹 회장, 이재현 CJ (120,900원 ▲2,900 +2.46%) 회장 등이 뒤를 잇고 있다. 한국 50대 부자 중 이 회장이나 정 회장처럼 선친으로부터 기업을 물려받은 상속자는 78%인 39명이며, 창업자는 22%인 11명이다.

일본 50대 부자 1위는 야나이 다다시(柳井正·자산 155억달러) 회장이며, 2위는 산토리의 3세 상속자인 사지 노부타(佐治信忠·107억달러), 3위는 IT기업 소프트뱅크의 한국계 일본인 손정의(91억달러) 회장이다.



일본은 대기업집단 출신이 14명으로 28%에 그친 반면 68%인 34명이 창업 기업인이라는 게 통계(2명은 미확인)이다. 통계만 보면 일본 기업이나 기업가들이 상속보다 창업을 통해 부를 창출한 사례가 많은 듯 착각하기 쉽다.

그렇다면 국내 부자 1, 2위를 달리고 있는 이건희 회장과 정몽구 회장이 대주주로 있는 삼성전자와 현대기아차를 단순히 '물려받은 부자'로 평가 절하할 수 있을까. 삼성은 이 회장의 '신경영 20년'을 거치며 2011년 기준으로 매출 23배, 이익 147배, 시가총액은 261배 늘었다. 포니 자동차로 국내 시장에 의존해 출발했던 현대차는 자동차의 본고장 미국, 유럽시장에서 맹위를 떨치는 글로벌 톱5 대열에 올랐다.

창업자인 이병철의 삼성과 수성자인 이건희의 삼성은 확연히 다르고 창업자인 정주영의 현대차와 정몽구의 현대차도 모습이 달라졌다. 창업과 수성을 각각의 분야에서 성공적으로 이끈 경우로 평가할 만하다.



상속부자가 많다는 이런 구조도 상속세가 50% 가량 되는 현실에서는 2~3세대를 거치면 오너가의 지분율은 현격히 떨어질 수밖에 없다. 100년을 훨씬 넘어서는 일본의 기업 역사에도 이런 영향도 있다.

이 기사의 관련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