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기업도 환율 저지선 붕괴..한계상황 돌입

머니투데이 양영권 기자 2013.01.14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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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율 하락에 '비상체제' 가동..주요 수출 기업 수천억 환차손 영향

지난 11일 원/달러 환율이 1년5개월만에 가장 낮은 수준인 1054.70원으로 떨어지자 수출 1위 품목 석유 제품을 생산하는 SK에너지 소속 '환관리위원회'의 움직임이 분주해졌다. 환관리위원회는 환율 변동이 클 때마다 소집되는 사내 비상설 조직이다. 회사 내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중심으로 자금, 판매부서 관계자 등이 참여한다. 이들은 최근 원화 강세가 심상치 않다고 보고 관련 대책 마련에 들어갔다.

SK 관계자는 "원유 수입과 석유화학제품의 수출 등 환율 변동에 민감한 만큼 '컨틴전시 플랜'(비상대응계획)을 가동하고 있다"며 "당초 올해 환율을 보수적인 1030~1080원대로 전망했는데, 현재 추세라면 전망치를 밑돌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원화가치 상승 속도가 가팔라지면서 국내 대기업들이 비상체제에 돌입했다. 원화 가치 상승은 일반적으로 수출업체에 불리하고 수입업체에 유리한 것으로 알려졌지만, 내수 침체가 장기화한 상황에서 그나마 남은 '수출'이라는 성장 동력마저 힘을 잃게 되는 것은 아닌지 우려가 커지고 있다.

SK에너지의 경우 국내 대표적인 석유업체다. 이 업종은 원화 가치가 높아지면 원유의 원화 환산 가격이 떨어져 이득을 본다는 얘기도 옛말이다. SK에너지는 지난해 1∼3분기 원유 수입액 31조7800억원보다 훨씬 많은 약 40조원어치 석유·화학 제품을 수출한 명실 공히 '수출기업'다. 가뜩이나 중국과 중동 등의 증설로 공급 과잉이 우려되고 있는데, 환율 하락으로 가격 경쟁력 하락이 불가피하다.



지난해 석유제품은 반도체를 제치고 품목별 수출액 1위를 차지했다. 따라서 석유제품 수출이 난항을 겪을 경우 나라 전체의 무역수지는 직격탄을 맞게 되는 구조다.

완성차 업종 역시 비상이다. 현대·기아차의 경우 해외 공장 증설 등을 통해 현지화를 상당부분 달성했다. 하지만 일본 자동차에 경쟁력이 떨어지는 것은 어쩔 수 없다. 최근 1년 사이 원/엔 환율은 1503원에서 1186원으로 21% 떨어졌다. 한국자동차산업연구소(KARI)는 최근 발간한 ‘엔화 약세와 자동차산업 영향’ 보고서에 따르면 원/엔 환율이 10% 하락하면 한국의 자동차 수출액이 12% 줄어든다.

자동차업계 관계자는 "현대기아차는 올해 사업계획을 수립할 때 기준환율을 1050원으로 설정했다"며 "이보다 낮아질 경우 현재 해외 시장에서 벌이고 있는 '제값받기' 캠페인도 차질을 빚을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삼성전자도 환율하락의 영향권에 있다. 지난해 매출 201조원, 영업이익 29조원이라는 경이적인 기록 달성에는 경쟁국에 비해 저평가된 원화가 숨은 조력자였다. 원화 가치가 높아져도 이같은 실적을 유지할지는 미지수다. 삼성전자는 원/달러 환율이 10원 하락할 때마다 영업이익이 약 1670억원 줄어들기 때문이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이를테면 지난해 3분기 기준으로 원화가 유로화, 루불화 등 이머징 마켓 통화 대비 강세를 보여 영업이익에 5700억원 정도 부정적 영향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대한상공회의소가 지난해 말 국내 수출기업들을 대상으로 집계해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수출 마진 확보를 위한 달러 대비 원화의 환율 마지노선은 1086.2원이다. 가전 1106.5원, 석유화학 1104.3원, 반도체·디스플레이 1099.0원, 음식료 1090.4원 등이다. 이 분석에 따르면 이미 국내 수출 업체들은 상당수 한계상황에 도달한 셈이다.

환율이 하락할 경우 수출에는 불리하지만 국내 물가안정에는 도움이 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인식이지만 최근에는 이같은 통설도 깨지고 있다.

안순권 한국경제연구원 초빙연구위원은 "환율이 하락 추세이지만 오히려 전기요금을 비롯한 공공요금이나 생필품 가격이 잇따라 인상되고 있어 내수 활성화는 요원해 보인다"고 말했다.

그는 "한국 제품이 수출 시장에서 과거에 비해 품질경쟁력이 좋아졌다고는 하지만 가격의 요인을 무시하지는 못한다"며 "환율 하락으로 국내 소비자에게 혜택은 거의 없고, 그나마 국내 경제를 지탱해 왔던 수출에만 부정적인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크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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