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신춘문예 우수상 '오라해서 갔더니'

머니투데이 강성오 2013.01.01 05: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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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8회 대한민국 경제올림피아드]

문자가 왔다. 일회용 커피를 종이컵에 넣어 정수기에서 뜨거운 물을 받아 놓고 재빨리 문자를 확인했다. 오늘 열 시까지 사무실로 들어오세요. 문자를 보낸 이는 거래처 이 과장이었다. 궁금증이 일었다. 김 대표는 이 과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무뚝뚝하고 다소 거만한 목소리가 수화기에서 흘러나온다. 김 대표는 아침 인사를 간단히 한 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이 과장은 별일 아니란다. 들어오시면 알게 된다는 성의 없는 말만 들려왔다. 김 대표가 다른 말을 막 하려는데 이 과장이 회의 준비해야 한다며 전화를 끊었다. 이 과장의 목소리에 공손함이나 친절함은 하나도 묻어나지 않았다. 별일 아니라지만, 찝찝한 기운이 마음 깊은 곳에서 머리끝까지 차오른다. 입안에도 꺼림칙한 뒷맛이 진하게 감돈다.

김 대표는 왼손에 종이컵을, 오른손으로 커피 봉지를 잡고 커피를 젓는다. 그쪽으로 젓지 마세요! 소리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리니 추위에 파리해진 얼굴의 아내가 덧붙인다. 환경호르몬이 나오잖아요. 김 대표는 휘젓고 있던 커피 봉지를 꺼내 확인한다. 한쪽 가장자리의 찢어진 녹색 부분에 커피가 묻어 있다. 이 나이에 환경호르몬은…. 김 대표는 봉지를 그대로 종이컵에 넣어 몇 번 더 휘젓는다. 김 대표는 커피 봉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 책상 위에서 담배를 집어 든다. 커피 마시면서 담배 안 피우시잖아요? 아내가 눈을 둥그렇게 뜨고 말했다. 카페인과 니코틴이 동시에 들어가면 고지혈증 걸린 몸에 좋지 않을까 봐 올해 초부터 삼가고 있었다. 예외 없는 법칙은 없잖아. 김 대표는 가볍게 한 마디 하고 문을 밀고 밖으로 나간다.



사무실 밖으로 나오자마자 도심 변두리의 싸늘한 공기가 온몸을 엄습한다. 저절로 몸이 움츠러든다. 올 들어 가장 춥다는 일기예보가 생각난다. 뜨거운 커피를 후후 불어 한 모금 삼키고 주위를 둘러본다. 밤새 내린 눈이 두꺼운 이불처럼 세상을 덮고 있다. 나무, 창고, 조립식 공장, 멀리 보이는 주택까지도 죄다 눈에 파묻혔다. 아름답게 보여야 할 하얀 세상이 암담하게 느껴진다. 고개를 차도 쪽으로 돌린다. 눈이 지저분하게 얼어붙은 도로를 차들이 느릿느릿 움직인다. 차량을 뒤덮은 눈을 대충 치운 차들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앞뒤 창문만 눈을 제거한 차량, 시야만 겨우 확보할 정도로 앞 창문의 눈만을 치운 차량, 지붕을 대나무 빗자루로 쓸어낸 흔적이 있는 차량 등 갖가지 형태로 눈을 치웠다. 지하 주차장에 주차한 듯 말끔한 차도 눈에 띈다. 김 대표는 빙판길을 달리는 화물차로 시선을 집중한다. 특히나 탑차들을 눈여겨본다. 무게중심이 높은 탑차가 휘청거리며 커브 길을 지날 때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듯하다. 김 대표는 시선을 더 먼 곳으로 향한다. 소형 탑차가 옆으로 누워 있는 모습에 눈에 잡힌다. 아! 자기도 모르게 탄식이 나왔다. 그보다 일 킬로미터쯤 앞 경사진 도로에는 트레일러가 비스듬히 멈춰 있다. 트레일러는 사 차선 도로의 삼 차로를 점령했다. 그 뒤로 승합차 두 대 승용차 한 대 RV 차 한 대도 오르막길에 아무렇게 방향을 잡고 움직이지 않는다.

김 대표는 커피를 창틀에 올려놓고 바지 주머니에서 휴대전화를 꺼낸다. 차주 중 가장 나이 많은 박 기사에게 전화를 건다. 정중히 예를 갖춰 전화를 받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김 대표는 자상한 어조로 운전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저는 걱정 말고 다른 차주들을 챙기라는 박 기사 말이 귓속을 파고든다. 가슴이 뭉클해진다. 육십이 넘은 나이에 화물차 핸들을 잡아야 하는 박 기사의 집안 형편이 뇌리에 스친다. 김 대표는 위암에 걸려 입원 중인 박 기사 아내 안부를 먼저 묻는다. 다음으로 박 기사 큰아들의-일 년째 직장을 구하고 있는 중- 취업 가능성이 어느 정도인지 챙긴다. 둘째 아들의 전역이 열흘 남았는데 그날은 하루 쉬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제의한다. 김 대표는 박 기사의 딸이 오늘 양가 상견례가 있는 날인데 사모님은 나갈 수 있는지 우려 섞인 어조로 체크한다. 박 기사가 뜸을 들인다. 김 대표는 하여튼 조심하라고 거듭거듭 당부하고 전화를 끊는다. 김 대표는 곧바로 두 번째 연장자에게 전화를 건다.



일곱 명의 차주들에게 일일이 전화를 걸어 가족까지 챙기고 나서야 김 대표는 창틀에 있는 커피를 집어 들었다. 커피를 한 모금 마신다. 날씨만큼이나 싸늘한 커피를 삼킨다. 커피가 목구멍에서 식도를 따라 위장으로 내려갔을 텐데, 한기가 온몸으로 느껴진다. 김 대표는 몸을 부르르 떨고 남은 커피를 바닥 한쪽에 버린다. 담배를 입에 물고 두 손으로 감싸 바람을 막고 일회용 라이터를 켠다. 바람에 불이 금방 꺼져버린다. 터보 라이터라도 있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몇 번의 시도 끝에 담배에 겨우 불을 붙였다. 김 대표는 오들오들 떨면서 담배를 피우고 냉큼 사무실로 들어간다. 추위가 따라 들어올까 봐 재빨리 문을 닫는다.

"추워서 도저히 안 되겄네. 오늘은 난로 좀 켜세."

김 대표는 책상 옆에 있는 전기난로를 켜며 아내를 바라본다. 전기세 타령을 하며 전기난로를 끄라는 말이 날아올 것 같아 가슴이 조마조마해진다. 두꺼운 털 점퍼를 입고 목도리를 친친 감고 있는 아내도 추웠을까. 별다른 말을 하지 않는다. 김 대표는 벌겋게 달아오른 두 개의 열선에 양손을 바싹 대고 비빈다. 손에 어느 정도 열기가 느껴지자 손으로 얼굴을 세수하듯 문지른다.


"열 시에 유진테크 이 과장이 들어오라는데?"

추위가 좀 가시고 나자 김 대표가 아내에게 말을 건넸다.

"왜요?"

아내가 호기심 어린 표정으로 물었다.

"물어 볼라고 했는디 바쁘다고 끊어버리데."

"뭐, 하루 이틀 겪나요? ……그나저나 오늘 열 시에 계약하기로 했잖아요?"

아내의 말이 비수가 되어 가슴에 박혔다. 김 대표는 잠시 천정을 올려다본다. 깊은 한숨을 쉰다. 오늘 주식회사 상아전자의 총괄 담당인 윤 부장과의 약속은 앞서 삼 일 전에 잡혔다. 김 대표는 벽에 걸린 시계를 본다. 여덟 시가 막 지났다. 부지런한 윤 부장이라면 출근하여 업무에 집중하고 있을 것이다. 김 대표는 윤 부장에게 뭐라고 둘러대야 할지 잠시 고민한다. 김 대표는 책상에 있는 상아색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내려놓는다. 이미 잡혀 있는 약속을 취소한다는 게 예의가 아니란 생각 탓이다. 잠시 망설이던 김 대표는 마음을 차분히 가라앉히고 휴대전화기를 꺼내 전화를 건다. 윤 부장이 아침 일찍 웬일이냐고 반갑게 받는다. 김 대표는 갑자기 중요한 일정이 생겨서 그런다며 아내를 대신 보내도 되는지 양해를 구한다. 빙판길을 운전하기 어려울 거라며 다음으로 미루자는 윤 부장의 말이 부드럽게 귀에 들어온다. 굳어 있던 김 대표 얼굴에 화색이 감돈다. 김 대표는 내일 오전 중 시간을 낼 수 있냐고 묻고는, 그럼 열 시에 찾아뵙겠다며 전화를 끊는다.

김 대표는 손바닥만 한 사각 쟁반에서 커피와 메밀 차를 회의실 원탁에 내려놓는다. 회의할라치면 으레 하는 행동이다. 낡고 오래된 원탁은 세월의 흔적이 진하게 묻어난다. 광택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칙칙한 자줏빛 원탁에 빨간, 파란, 검정 글씨가 그득하다. 때때로 메모지 대용으로 삼은 탓이다. 원탁 둘레에 인조 목으로 등받이를 만든 바퀴 없는 네 개의 의자가 놓여 있다. 김 대표는 의자 하나를 빼고 앉는다. 걸레로 책상을 닦고 있던 아내도 청소를 서둘러 마무리하고 회의실로 들어와 원탁에 앉는다. 둘은 말없이 커피와 메밀 차를 한 모금 들이킨다. 잠시 묵직한 침묵이 흐른다. 김 대표가 먼저 말문을 연다.

"십이 월이라 내년 계약 건 때문이겄제?"

김 대표가 아내 얼굴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김 대표는 이 과장이 왜 불렀을지 다각도로 생각해 보았으나 딱히 집히는 게 없었다. 그동안 이 과장과 내년 계약 건 때문에 몇 번 통화를 한 적이 있으니 그 연장선일 거라는 생각이 지배적이었다. 아내도 그렇게 판단 한 듯 고개를 끄덕인다. 어두운 표정으로 앉아 있는 아내가 입을 연다.

"탕바리는 절대로 안 된답디여?"

"이 사람이. 몇 번이나 안 된다고 말 했잖은가?"

아내가 갑자기 시무룩한 표정을 짓는다. 김 대표도 양 팔꿈치를 책상에 올리고 오른손 엄지, 검지, 중지로 미간을 마사지한다. '월대'(월정액)나 '회당 단가'는 수입 면에서 상당한 차이가 있다. 특히나 차주들은 더욱 그렇다. 현재 유진테크와는 월 삼백육십만 원에 열두 대 계약되었다. 회당으로 계산하면 물류량이 많고 거리가 가까워 보통 이하의 가격을 적용하더라도 월 오백만 원은 훌쩍 넘는다. 지입료 칠 퍼센트를 적용하면 한 대당 십만오천 원의 지입료가 더 발생한 셈이다. 하지만 아내는 지입료보다 차주들이 어쩐지 손해 보고 있다는 생각에 어두운 표정을 짓고 있을 것이다.

"내년에는 삼백칠십은 넘어야 할 텐데."

아내가 자조 섞인 어조로 말했다. 김 대표는 속으로 재빨리 계산해보았다. 그렇게 계약해도 지입료, 기름값, 보험료, 수리비 등을 빼고 나면 차주들 수중에 이백만 원도 채 들어가지 않을 게 뻔하다. 김 대표는 리프트까지 설치한 오 톤 탑차 가격을 되짚어 본다.

"팔천만 원도 넘게 발라놓고 뭐하자는 일인지……."

김 대표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을 다셨다. 불현듯 자신도 뭐 하고 있는 것인지 의구심이 솟아오른다. 늘 느낀 거지만 법인 설립 비용은 제외하더라도 차고지 임대료, 사무실 임대료, 보유하고 있는 자차 수리비 등으로 매월 칠백만 원을 넘게 지출해야 하는 게 큰 부담으로 다가온다. 차량 오십 대에서 들어오는 지입료에서 지출을 제외하면, 채 오백만 원도 남지 않는다는 사실에 얼마나 자주 허탈해했는지 모른다. 업무로 또 밤잠은 얼마나 설쳤는가. 거래처에서 차량 문제로 전화를 걸어오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난 적이 허다했다. 그럴 때면 아내도 자동반사적으로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시때때로 걸려오는 전화에 둘이 맨몸으로 벌어도 그 정도는 벌 것이라고 자주 푸념을 늘어놓곤 했다.

"상아전자처럼 삼백팔십은 턱도 없겄죠?"

아내가 턱 끝을 바짝 치켜세우고 물었다.

"자기들이 제일 큰 거래처라고 뻔히 네고하자고 강하게 나오겠지 뭐."

"그래도 삼백칠십오를 마지노선으로 합시다. 일하는 보람은커녕 현상유지라도 해야 할 거 아뇨?"

"누가 그걸 모른가? 칼자루를 거기서 쥐고 있어서 그러지."

김 대표 말끝이 한없이 내려갔다. 시선도 원탁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어떻게 해서라도 삼백칠십오는 넘게 계약해오라는 아내 말이 항공모함처럼 무겁게 가슴을 짓누른다. 김 대표는 속으로만 웅얼거린다. 누군들 그렇고 싶지 않겠어? 김 대표는 휴대전화를 보고 시간을 확인한다. 08:35 라는 디지털 숫자가 눈에 들어온다. 김 대표는 출발 시간을 가늠해본다. 평소 같으면 이십 분도 채 안 걸리는 도로지만 미끄러운 걸 감안해 한 시간 일찍 출발하기로 마음먹는다. 시간상 약간의 여유가 있다고 판단한 김 대표는 캐비닛을 열어 계약서 파일을 꺼낸다. 파일을 빠르게 넘기던 손길이 유진계약서에서 멈춘다. 김 대표는 계약서에 시선을 떼지 않고 문장 하나하나를 꼼꼼히 훑는다. 제7조 ②항에 눈길을 박고 속으로 읽어본다. "계약 파기나 조건 변경 시 한 달 전에 서면으로 통보하기로 한다." 이 조항은 김 대표 머릿속에 각인되어 있고 회의 전에도 확인했다. 이 조항대로라면 유진테크에서 계약 파기나 조건 변경에 대한 건으로 부른 것 같지는 않다. 아니, 애써 그렇게 자위한다. 별일 아니라고 했지만 내심 불안했다. 유진테크에서 계약 종료하자고 할 것만 같은 불안감이 앙금처럼 남아 있다.

계약 종료하자고 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십이월이 시작되자 숱하게 고민했다. 묘안은 떠오르지 않고 머리만 어지러웠다. 새로 뚫을 수 있는 거래처를 되짚어보았다. 한 업체가 생각났다. 견적을 제출하라고 해서 찾아갔더니 터무니없이 낮은 가격을 제시하며 할 수 있는지 물었다. 검토하겠다고 정중하게 말하고 돌아섰지만 속으로 엑스 표시를 그었다. 시세보다 삼십만 원이나 낮은 가격에 계약했다가는 다른 물류사들이 가만있지 않을 것이다. 제살 깎아 먹자는 말이냐, 잘하고 있는 C물류와 원수졌느냐, 물 먹일 작정을 했느냐, 파급 효과는 안중에도 없느냐는 등 갖가지 욕설을 퍼부을 게 뻔했다. 담합은 하지 않았지만 도의적으로 그럴 수도 없고. 돌이켜 생각해도 김 대표는 가슴이 컥 막히는 듯하다. 어찌어찌 그 업체와 다섯 대를 계약한다 해도 나를 믿고 따랐던 나머지 여덟 명의 차주는 어떻게 한단 말인가. 이래저래 김 대표는 답답하기만 하다. 김 대표는 밖으로 나가 담배를 뻑뻑 피워댄다.

공단에 진입한 김 대표는 4차선 도로를 빠져나와 유진테크로 들어가는 좁은 길로 들어섰다. 오늘도 편도 일 차선에 차들이 즐비하게 주차돼 있다. 트럭 한 대가 겨우 지나갈 정도다. 오가는 차와 마주친다면 누군가는 공장 입구로 들어가야 운행할 수 있다. 여느 때처럼 도로가 얼지 않았다면 모를까. 그러다 접촉사고가 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더군다나 이 도로는 김 대표 회사 소속 차들이 반드시 지나가야 하는 도로가 아닌가. 김 대표는 고개를 돌려 후방을 살핀다. 뒤에 차가 보이지 않자 후진 기어를 넣고 천천히 후진한다. 김 대표는 도로 가에 주차하고 노트를 챙겨 인도를 따라 걷는다. 복사뼈까지 쌓인 도로에 발자국이 거의 없다. 구두에 들어온 눈이 녹아 금세 양말이 축축해졌다. 귓불이 드라이아이스만큼 차갑게 느껴진다. 전깃줄에 바람 갈리는 소리가 휘파람처럼 들려온다.

오백 미터쯤 걸어 유진테크 정문에 도착해 시간을 확인한다. 약속 시간 십 분 전. 김 대표는 경비실에서 출입자 명단에 자신의 이름을 기록하고 사무동 현관에서 이 과장에게 전화를 건다. 이 과장은 한 마디 말도 없이 전화를 끊어버린다. 회의 중이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문자가 날아온다. 김 대표는 회의 끝나면 전화 주시라는 문자를 전송한다. 얼음처럼 차갑고 축축한 발과 에일듯한 귓불을 조금이라도 녹이기 위해 계단 밑에 있는 화장실로 들어간다. 김 대표는 바지를 내리지 않고 좌변기에 걸터앉는다. 엉덩이에 따뜻함이 전해진다. 김 대표는 장갑을 벗고 허벅지 밑 변기 커버에 손을 넣어 추위에 굽은 손을 녹인다. 이 과장이 전화할 때까지 노크 소리를 듣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마음이 든다.

"내일모레부터 라인 공사가 시작되거든요?"

약속 시간보다 이십오 분 늦게 만난 이 과장이 바로 본론으로 들어간다.

"……."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김 대표는 어떤 대꾸도 할 수가 없다. 호기심 어린 눈으로 물끄러미 이 과장을 바라볼 뿐이다. 체구가 왜소하고 몸이 후리후리한 이 과장은 돼지 털처럼 머리카락이 빳빳해 보인다. 군대 조교를 연상케 하는 각진 얼굴에 두툼한 안경을 끼고 있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요. 모레까지만 차량을 넣어주시라고요."

이 과장이 부하 직원에게 하는 어투로 통보하듯 말했다.

"물량이 없으면 어쩔 수 없죠."

김 대표는 망설이지 않고 대답했다. 공사로 공장을 세워야 한다는데 누군들 반문하겠는가.

"물류비는 일 할로 정산하겠습니다."

김 대표가 순순히 동의했다고 생각한 것인지, 이 과장이 거리낌 없이 말했다. 마치 사전에 합의된 사항을 되짚어보는 듯한 뉘앙스로.

"예?"

김 대표 말끝이 자기도 모르게 높아졌다. 속으로는 십이 일치만 정산한다면 얼마인지 계산해본다. 어림짐작으로 백사십만 원이 조금 넘을 듯하다. 그 돈을 고스란히 가져가도 생계가 막막할 텐데. 김 대표는 차주들을 생각하니 절대 수용하지 못하겠다는 마음이 앞선다. 김 대표는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말라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이 과장 눈을 똑바로 응시한다.

"일을 안 하는데 대금을 줄 수는 없잖아요?"

이 과장은 그거는 당연한 거 아닌가요, 라는 표정으로 김 대표를 힐난하듯 바라본다. 김 대표는 속에서 무언가가 꿈틀꿈틀 기어오르고 있음을 느낀다. 이런 안하무인격인 사람과 마주앉아 대화하고 있다는 사실에 서글픔도 느껴진다.

"턴키 계약이라 하루를 하든 이틀을 하든 계약된 금액은 줘야 맞는 거잖습니까?"

김 대표는 격앙된 감정을 꾹꾹 억누르며 점잖게 말했다.

"아니, 십이 일밖에 안 하고 한달치를 달라는 건 도둑놈 심보 아닌가요?"

도둑놈 심보라는 말에 김 대표는 속에서 부아가 부글부글 끓어오른다. 이 과장이 눈치채지 못하게 어금니를 앙다문다. 김 대표는 마른 침을 꿀꺽 삼키고 나서 말문을 이어간다.

"공사로 매출이 줄면, 차라리 이러이러하니 고통을 분담하자는 말을 먼저 꺼내야지 무턱대고 모레부터 차량을 넣지 말라면 차주들을 어떻게 관리합니까?"

안간힘을 쓰며 평정심을 유지하려는 마음과는 달리 말투에 가시가 박혀 나온다.

"그동안 기사들이 고생했으니 이번 기회에 푹 쉬었다 나오면 좋잖아요?"

이 과장 말에도 만만찮은 기운이 서려 있다.

"차주님들 하나같이 팍팍하게 살고 있거든요. 연말연시라 돈도 많이 들어갈 텐데, 그렇게 오래 쉬면 심각한 타격을 받을 게 뻔하잖습니까?"

이 과장과 기 싸움에서 이기려 하기보다는 정말 차주들 입장을 대변하고 싶은 마음을 드러냈다.

"그건 그쪽 사정이고요."

김 대표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귀싸대기라도 한 대 갈기고 싶은 마음 굴뚝같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는 노릇이고. 복장이 터질 듯하다. 김 대표는 회의 시작 전 이 과장이 자판기에서 뽑아준, 다 식어버린 바닥 난 커피를 마시기 위해 종이컵을 입에 물고 고개를 뒤로 한껏 젖힌다. 입안으로 커피가 흘러들어오기를 바라며 다른 방안을 궁리한다. 묘안이 떠오르지 않는다. 구두상 약속을 계약서보다 더 중시하는 김 대표는 결국 계약서를 들먹인다.

"계약서에도 나와 있잖아요? 조건 변경 시 한 달 전에 서면으로 통보하기로. 그런데 이틀 남겨 놓고 이렇게 구두로 통보하면 저보고 어쩌란 말입니까?"

"그래서 일하기 싫어요?"

이 과장이 된통 언성을 높였다. 김 대표는 자기도 모르게 불끈 주먹이 쥐어졌다. 이 과장이 조금만 더 길게 말했다면 한 방 날렸을지도 몰랐다. 김 대표는 눈을 지그시 감고 기분을 가라앉힌다.

김 대표 주머니에서 휴대폰이 진동한다. 김 대표는 이 과장에게 잠깐만요, 라고 말하고 몸을 약간 비틀어 휴대전화를 받는다. 발신자는 서른두 살 먹은 차주 정 기사다. 갓 결혼한 정 기사는 오 톤 트럭으로 상아전자 제품을 D전자로 운송한다. 커브 길에서 미끄러져 차가 넘어졌다는 정 기사 말에 김 대표 얼굴이 흙빛으로 변한다. 김 대표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일까. 몸은 하나도 다치지 않았으니 걱정 말라는 정 기사 말이 또렷하게 들려온다. 차를 한 대 보내달라는 말이 뒤따른다. 차량이 넘어진 탓에 그 안에 있던 제품을 다른 차로 옮겨 운송해야 한단다.

김 대표는 갑자기 눈앞이 캄캄해짐을 느낀다. 제시간에 제품을 입고하지 못해 D전자 라인이 멈춘다면, 유실비가 초당 이천팔백 원이란 사실이 번개처럼 뇌리에 스친다. 유실비에 대해 여러 업체에서 귀동냥을 한 탓에 십 분이면 십육만 팔천 원이고 한 시간이면 백만팔천 원이라는 금액이 뇌리에 각인되어 있다. 유실비도 부담이지만 그보다는 거래처인 상아전자가 D전자로부터 라인 스톱에 따른 패널티를 받는 게 더 두렵다. 패널티를 받게 되면 신규 물량이 끊겨 성장하는 데 상당한 악영향을 끼친다. 게다가 상아전자 대표이사가 D전자로 불려 가 갖은 수모를 당해야 한다. 어찌나 모멸감을 느끼는지 두 번 다시 들어가라면 차라리 회사를 포기하는 게 났다는 말까지도 서슴없이 나돈다. 물론 과장되기는 했을지라도. 그러니 혼쭐난 대표이사가 담당 직원을 불러 야단치는 건 너무도 쉽게 예견된 수순이었다. 김 대표에게 관대한 윤 부장이 상사들에게 호되게 질책당하고 시말서를 작성하는 모습이 눈앞에 아른거린다. 김 대표는 고개를 세차게 흔든다.

김 기사를 지원할 만한 차주는 누굴까. 몇 명의 차주가 우선 떠오르지만 어제저녁에 근무하고 다들 잠들어 있을 것이다. 콩알만 한 심장으로 조마조마하며 밤새 빙판길을 다니느라 녹초가 되었을 텐데 다시 불러내고 싶지는 않다. 주간에 핸들을 잡고 있을 차주들을 한 분 한 분 떠올리며 가능성을 짚어보지만, 오늘 같은 상황에서는 자기들도 시간 내에 입고하느라 정신이 없을 게 뻔하다. 막히면 언제나 생각했던 사람. 아내. 그렇다. 이 사고를 수습할 만한 사람은 아내가 유일하다. 지금 아내는 유가환급금을 신청하기 위한 서류를 준비하느라 정신이 없을 것이다. 김 대표는 아내에게 전화를 건다. 아내에게 자초지종을 말하고 정 기사를 도와 상아전자 제품을 납품하라 하고 전화를 끊는다. 보나 마나 아내는 하던 일 멈추고, 서랍에서 키를 찾아, 주차장으로 뛰어가, 오 톤 트럭을 몰고 정 기사가 있는 곳으로 정신없이 달려갈 것이다. 김 대표는 이 과장을 바라보며 말을 이어간다.

"중요한 문제라 차주님들과 회의를 좀 해보고 결정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사고가 나서 가봐야 될 것 같기도 하구요."

김 대표는 애잔한 눈으로 이 과장을 쳐다본다.

"결정하고 가시면 되잖아요?"

이 과장이 턱 끝을 바짝 치켜세우고 말했다.

"일단 고통분담에 동참하자고 차주님들을 설득해보겠습니다. 그런 후에 다시 만났으면 합니다."

김 대표는 테이블 위에 펼쳐놓은 노트를 덮으며 말했다. 볼펜도 상의 안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오늘 결정해야 하거든요?"

이 과장이 여전히 팔짱을 껸 채 단호하게 말했다. 김 대표 마음에는 온통 정 기사와 윤 부장 얼굴뿐이다. 일 초라도 빨리 여기를 벗어나고 싶다. 하지만 이 과장의 굳은 표정을 보아하니 그냥 가서는 안 될 듯하다.

"그럼 이렇게 하는 건 어떻겠습니까?"

이 과장이 팔짱을 풀고 의자를 바짝 당겨 앉으며 관심을 보인다.

"공장 사정으로 삼 일 이상 쉴 때는 근로자들에게 임금의 최소 칠십 퍼센트는 줘야 하잖습니까. 우리도 칠십 퍼센트 선에서 결정하시죠?"

김 대표는 애써 씁쓸한 마음을 숨기며 이 과장 얼굴을 살핀다. 이 과장 표정에 변화가 없다.

"사십 프로 일하고 칠십 프로를 달라구요? 그건 아니죠. 그건 정규직에나 해당된 말이잖아요? 이럴 때를 대비해서 용차를 쓰는 거지 그렇지 않으면 뭐하러 용차를 쓰겠어요? 그러니 실비로 정산하는 게 맞잖아요?"

"그렇다면 그동안 일요일에 무상으로 일한 거 정산해 주실랍니까? 계약서에는 일요일 부분은 빠졌잖습니까? 그래도 서비스 차원으로 그냥 해드린 건데 모두 정산해주실 수 있습니까?"

"그건 서비스차원으로 해 주기로 했잖아요?"

김 대표 얼굴이 붉게 상기되었다. 유진테크에서 작년 말에 계약할 때 그랬다. 일요일날 공장을 가동한 날이 어쩌다 한 번 있을까 말까 한다고. 그래서 그 말을 믿고 구두 상으로 그냥 약속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서비스 차원에서 무상으로 할 거라고. 하지만 유진테크는 한 달에 최소 두 번은 공장을 가동했다. 애초 말한 것보다 확연한 차이였다.

할 말을 잃은 김 대표는 우두커니 앉아 허공을 바라본다. 휴대전화가 또 떨린다. 김 대표는 이 과장에게 양해를 구하고 몸을 비틀어 전화를 받는다. 겁에 질린 아내 목소리가 힘없이 귓속을 파고든다. 눈길 운전은 도저히 자신 없단다. 차에 올라탄 순간 오줌이 지릴 것 같다고 김 대표더러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한다. 김 대표는 고개를 끄덕인다. 베테랑 기사들도 힘든 판에 이 년 남짓한 운전 경력으로 빙판길을 달려야 한다는 게 겁날 법도 하다.

"아무래도 가봐야겠습니다. 과장님 제안은 차주님들과 의논해서 말씀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김 대표는 이 과장의 눈치를 살피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난다. 노트를 들고 돌아서는 김 대표 귀에 이 과장 말이 파고든다.

"공사를 해도 하루 한두 탕은 뛰어야 되거든요? 한 탕에 만팔천 원 드릴게요."

김 대표는 가던 길 멈추고 뒤돌아선다. 하루 두 탕 뛰자고 누구를 대기시켜야 합니까. 스파성(긴급성)은 회당 팔만 원이 넘잖습니까? 라는 말이 목구멍에서 소용돌이처럼 맴돈다. 하지만 뱉어내지 못한다.

"이번에 실비로 정산한다면, 내년에 탕바리로 계약할 수 있습니까?"

이 과장의 '탕바리'란 말에 김 대표는 불현듯 다른 방안이 떠올랐다. 내년에 회당 단가만 보장된다면 어떻게든 차주들을 설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탕바리는 안 된다고 몇 번이나 말했잖아요? 어쨌든 이번 달은 실비정산을 하는 걸로 마무리 짓죠?"

김 대표는 연락드리겠노라고 말하고 돌아선다. 추위에 떨고 있을 정 기사와 아내 얼굴이 어른거려 도저히 있을 수가 없다. 어쩌면 더 이상 이야기를 나누다가는 이 과장의 멱살이라도 움켜쥐게 될까 봐 얼른 벗어나고 싶은지도 모른다. 그것도 아니라면 동상에 걸릴 듯 축축하고 차가운 발 때문인지도 모르고. 어쨌든 김 대표는 유진테크 사무실 문을 밀고 나온다. 이 과장은 배웅한답시고 따라 나온다. 인사하는 김 대표에게 이 과장은 일 할 정산에 만팔천 원입니다, 라는 말을 힘주어 강조한다.

함박눈이 바람에 흩날려 난분분하다. 도로에 쌓인 눈이 복사뼈를 넘었다. 아까 걸어올 때 생겼던 발자국은 오간데 없다. 김 과장은 눈 덮힌 도로를 터벅터벅 걷는다. 눈이 구두 속을 끊임없이 파고든다. 영하의 바람이 귓가를 휘감는다. 김 대표는 노트를 겨드랑이에 낀 채 잔뜩 몸을 움츠리고 조심스럽게 도로를 걸어간다. 눈길에 미끄러져 휘청, 중심을 잃더니 바로 중심을 잡는다.

자동차에 올라타 시동을 건다. 눈발이 점점 굵어진다. 자동차 앞 유리에 눈이 켜켜이 내려앉는다. 시야가 흐릿하다. 답답하다. 김 대표는 와이퍼를 작동시킨다. 유리에 달라붙은 눈이 성에가 되어 오히려 시야를 악화시킨다. 워셔액 스위치를 작동한다. 부동액이 함유된 워셔액이 창문에 뿌려지고 와이퍼가 작동된다. 김 대표의 의도와는 다르게 워셔액이 살얼음으로 변해 시야를 아예 막아버린다. 와이퍼를 가장 빠르게 작동시켜 보지만 살얼음은 제거되지 않는다. 김 대표는 온도계로 시선을 돌린다. 온도계 눈금이 바닥에 머물러 있다. 따뜻한 바람이 나오려면 한참이 걸릴 것이다. 김 대표는 사물함에서 성에제거기를 꺼내 들고 밖으로 나간다. 성에제거기를 두 손으로 잡고 유리를 박박 긁는다.

갑자기 뱃고동처럼 큰 클랙슨 소리가 다급하게 들려온다. 소리 나는 쪽으로 냉큼 고개를 돌린다. 중심을 잃은 초대형 트레일러가 비슷한 각도를 유지하며 점점 가까이 다가온다. 김 대표는 재빨리 인도로 올라가 전봇대 뒤로 몸을 피한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트레일러의 움직임을 뜯어본다. 트레일러는 아슬아슬하게 김 대표 차를 비켜 지나간다. 안도의 한숨이 길게 나온다. 한숨은 순식간에 하얀 김으로 변해 허공으로 빠르게 흩어진다. 김 대표는 트레일러가 중심을 잡고 제대로 가는 것을 보고도 한참이나 있다가 자동차에 오른다. 온도 게이지를 바라본다. 바늘이 첫 번째 칸 언저리에 있다. 따뜻한 바람이 앞 유리에 나오게 가장 강한 세기로 튼다. 사이드미러와 룸미러를 번갈아 살피며 유리창에 성에가 제거되기를 기다린다. 휴대전화가 짧게 울린다. 휴대전화로 눈길을 돌려보니 문자가 와 있다. 김 대표는 발신자가 누구인지 살핀다. 유진테크 이 과장이다. 김 대표는 씁쓸한 표정으로 내용을 확인한다. '12월은 실비로 정산한다는 내용을 공문으로 좀 보내주세요.' 휴대전화에서 눈길을 거둔 김 대표는 자동차를 출발시킨다. 앞 유리에는 아직 성에가 그대로다. 눈 내린 밖이 뿌옇게 흐려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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