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벌3세, 中학생이 "사업을 모르네" 지적에…

머니투데이 실리콘밸리=유병률 특파원 2012.10.15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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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률의 체인지더월드]'LS 장손' 구본웅 포메이션8 대표, 벤처에 빠진 이유

구자홍 LS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구본웅 포메이션8 대표. 그는 "지금과 같은 대기업구조는 깨질 수밖에 없다"며 "벤처와 손잡을 줄 아는 대기업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캘리포니아 팔로알토=유병률기자     구자홍 LS그룹 회장의 외아들인 구본웅 포메이션8 대표. 그는 "지금과 같은 대기업구조는 깨질 수밖에 없다"며 "벤처와 손잡을 줄 아는 대기업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사진/캘리포니아 팔로알토=유병률기자


LS그룹 패밀리의 장손인 구본웅(33) 포메이션8 대표가 우리나라 대기업 창업세대가 이뤄냈던 성과까지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지금의 대기업 경영방식에 대해서는 할아버지(구태회 LS 명예회장), 아버지(구자홍 LS 회장)가 이 인터뷰를 봐도 되나 싶을 만큼 모질게 비판했다.

"한국 대기업은 (내부적으로) 정말 소통이 안 된다" 고 말문을 연 그는 "한국 대기업 상당수가 한 순간에 '훅' 갈 수 있다" "솔직히 말하면 (지금과 같은) 대기업구조가 깨질 수밖에 없을 것"이라고 했다.



도대체 지난 10년간 실리콘밸리에서 무엇을 보았길래 저토록 대기업에 야박하고, 무엇을 경험했길래 "한국의 운명이 벤처에 달려있고, 벤처와 손잡을 줄 아는 대기업만이 살아남을 것"이라고 장담하는 것일까?

그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군대에 갔다 온 뒤 2002년 스탠포드대(경제학)에 진학했다. 이후 이 대학 MBA(경영학석사)를 마치고 '하버퍼시픽'과 '포메이션8'이라는 벤처캐피탈을 설립해 운영하고 있다.



창업준비생이 재벌3세에게 "네가 사업을 모르는 구나"
처음 스탠포드에 왔을 때만해도 졸업하고 패밀리 비즈니스를 하는 것이 '내 인생'이려니 생각했다고 한다. 그것도 어디 보통 가업(家業)인가. 한국을 대표하는 대기업이지 않은가. 당연히 경제학도 가업을 위한 선택이었다.

"그런데 1학년 때 교실에 들어갔는데 옆에 앉은 중국인 친구가 스타트업(초기기업) 창업에 대해 얘기 하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얘기해줬죠. '사업은 그렇게 하는 게 아니야. 애들 장난도 아니고…' 그래도 제가 보고 자란 게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친구가 그러더라고요. '네가 뭘 잘 모르는구나'."

그는 그때부터 스타트업 창업에 뛰어든 동료학생들, 실리콘밸리 벤처캐피탈들을 만나기 시작했다. 스탠포드내에서도 컴퓨터공학과 친구들과 주로 어울렸고, 학부 4년간 6개 스타트업에 가담했다가 여러 번 망하기도 했다.


그러나 실패하면서 많은 것을 얻었다. 무엇보다 인맥. "미국은 중국만큼이나 '꽌시(關係)'가 무서운 데 입니다. 가족 단위로 집으로 초대해서 같이 밥 먹고 하는 것이 이게 다 한국으로 치면 접대거든요. 스타트업을 경험하면서 (꽌시) 이쪽으로 무진장 팠습니다. 지금도 파고 있고요."

그래서 지난해 그가 주도가 돼서 만든 포매이션8의 나머지 7명의 면면을 보면, 야후의 재무담당 부사장을 거쳐 유튜브와 페이스북 최고재무책임자(CFO)를 지낸 기든 유 샌프란시스코49ers(미 프로풋볼팀) 최고전략책임자, 실리콘밸리 최고의 클린테크놀로지 전문 벤처캐피탈 CMEA 창업자 톰 바루크 등 그의 표현대로 실리콘밸리 '탑 티어(Top Tier, 최상위)'이다.

하지만 이런 막대한 개인적 꽌시에도 불구하고 그가 대학을 졸업할 때 내렸던 결론은 자신이 스타트업을 가장 잘할 수 있을 것 같진 않다는 것. 그때부터 그가 한 것이 실리콘밸리의 혁신기술을 한국 대기업에 접목하는 사업이었다. 한국 대기업을 제대로 한번 들여다보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한국 대기업은 신사업 의지만 있지, 할 줄을 모른다"
포메이션8 역시 벤처캐피탈이긴 하지만 투자 잘하고, 관리 잘해서, 수익 올리는 통상적인 방식과는 많이 다르다. 실리콘밸리 혁신벤처에 투자를 해도 투자수익 자체보다 이런 기술을 아시아 대기업에 접목하는 것이 더 큰 목적이다. 아시아기업이 이런 혁신벤처를 인수해 세계시장을 확 뒤집을 만한 새로운 산업을 만들도록 해보자는 것이다.

"한번 보세요. 지금은 인프라가 바뀌고,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이 바뀌는 시대입니다. 아시아기업이 제대로 된 테크놀로지와 손 잡으면 새로운 거대산업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런데, 지난 수년간 아무리 봐도 한국 대기업은 신사업 의지는 있어도, 도저히 할 줄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우선 한국 대기업은 구조적으로 내부 신사업이 성공하기 어렵다는 것. "한국 대기업은 재미있는 것이 신사업 보고하면서 매년 목표치를 딱 박는다는 거에요. '내년에 300억 찍겠습니다'라는 식으로 말이죠. 이러면 큰일 나는 거죠. 모든 활동이 그 숫자를 맞추기에 급급해지는 겁니다. 사람에 더 투자하고, 인프라 더 까는 것이 불가능해집니다. 매년 평가 받는데 어떻게 신사업을 하겠습니까?"

내부에서 혁신이 안되면 밖에서 수혈을 해야 하는데, 이에 대한 문제의식도 없다는 것이 그의 지적. "예를 들어 엔지니어 10명이 일하는 스타트업을 10억원에 인수하는 딜이 올라오면, 임원들이 꼭 그러세요. '우리가 50명 넣고, 200억 부으면 충분히 만들지, 그걸 왜 못 만들어'라고요. 그런데 못 만들거든요. 못 만든다는 게 정답이에요. 그런데도 '우리가 못할 게 뭐 있어'라는 식이죠."

더 따지고 들어가면, 벤처에 대한 대기업들의 인식이 여전히 '갑'과 '을'의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고 그는 비판했다.

"실리콘밸리 대기업들은 '내가 갑이니깐 들어와서 얘기나 한번 해봐라'라는 태도로 벤처를 대하진 않죠. 중요성을 알기 때문이죠. 여기 대기업 CEO나 임원들은 회사나 카페에서 엔지니어나 스타트업 만나는 게 일상이에요. 그런데 한국 대기업은 일선에서 스타트업을 검토하면 그게 보고서가 돼서 차례차례 올라가는데, 올라가면 갈수록 '이걸 우리가 왜 (인수나 투자를) 해야 되는데'가 되는 겁니다."

"한국 대기업과 한국의 운명이 벤처에 달렸다"는 재벌3세
그는 처음에는 비난만 했다고 한다. "왜 그렇게 비효율적이시냐"고. 아무리 좋은 기술, 좋은 벤처를 소개해도 도무지 피드백이 없으니 말이다. 그러다 문득 드는 생각. '한국 대기업은 구조적으로 안 되는 게 있다. 따지기만 하지 말고, 받아들일 수밖에 없도록 제시하자'는 것.

그는 실리콘밸리 혁신기술을 소개하는 것을 넘어, 이를 통해 어떤 새로운 비즈니스를 만들어 낼 수 있는지 함께 설계하고, 벤처를 인수하는 모든 과정 일체를 지원하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대기업들의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KT CJ LS NHN 등이 포메이션8 펀드에 투자했고, 삼성과 LG와도 사업협력을 하고 있다.

예를 들어 CJ. "CJ의 고민은 그 뛰어난 문화 콘텐트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이를 글로벌 비즈니스로 만들고 있진 못하다는 것이죠. CJ에 필요한 것은 콘텐트를 세계적으로 유통시키고, 유저들의 엑티브한 활동을 불러일으켜서, 그 안에서 비즈니스를 만들어낼 수 있는 플랫폼입니다."

그래서 구 대표는 레이디 가가가 대주주로 있는, 실리콘밸리의 소셜미디어플랫폼 블랙플레인을 CJ에 소개했고, CJ는 조만간 이를 통해 K팝 소셜네트워크서비스를 시작한다.

"한국 대기업은 세계적으로 브랜드 이미지는 좋지만, 문제는 단품 위주의 수출이라는 겁니다. 매력적인 토털 솔류션을 제시하고 있지 못해요. 중국이 더 싼 가격으로 치고 들어오면 굳이 한국 제품을 쓸 이유가 없어지는 겁니다"

그래서 구 대표는 한국의 운명이 벤처에 달려있다고 말했다. 앞으로 벤처와 손을 잡고 함께 신사업을 만들어 갈 수 있는 대기업만이 살아 남을 것이라고.

두세 평짜리 사무실에 책상과 컴퓨터 정도 갖추어놓고 한국 대기업의 넥스트 모델을 만들어가고 있는 재벌 3세. 구 대표에게는 재벌가 장손이라는 수식어가 오히려 초라해 보였다. 왜냐? 고래 싸움에 새우등 터진다는 속담은 이제 한 물 갔기 때문에. 새우 무서워할 줄 아는 고래만이 바다에서 쫓겨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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