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죄줄고 돈벌고" 英 캐머런의 '큰 사회' 실험

머니투데이 서울=이경숙 기자, 런던=문진수 한국사회적금융원장 2012.09.24 06: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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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세없는 복지의 길, 사회투자] <2-1> '빅소사이어티캐피털'

편집자주 세계 금융위기 이후 재정 한계에 부닥친 정부, 요동치며 불안한 자본시장에 한계를 느낀 대형투자자, 빈곤인구의 거대한 고통에 대한 해법을 찾는 자선가. 이들이 한 테이블에서 만나고 있다. '사회투자'라는 테이블이다. '사회투자'는 자본이 혁신을 일으키는 원리를 사회 문제 해소에 적용해 '증세 없는 복지', 투자가 되는 복지의 길을 열어줄 것으로 기대되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 데이비드 캐머론 영국 총리 등도 앞다퉈 도입하고 있다. 따라서 복지국가를 공약으로 내걸고 있는 대통령선거 후보들에게도 재정 투입을 최소화하면서 복지 문제를 해결할 비법이 될 수도 있어 관심을 끌 것으로 보인다. 머니투데이는 6회에 거쳐 국내외에서 시작되고 있는 사회투자의 새로운 트렌드를 소개한다.

↑플리트 가(街)엔 런던 최고(最古)의 차일드 은행 등 16∼18세기 당시의 옛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론니 맥도날드/플리커↑플리트 가(街)엔 런던 최고(最古)의 차일드 은행 등 16∼18세기 당시의 옛 건물이 많이 남아 있다. ⓒ론니 맥도날드/플리커


2010년 옥스퍼드영어사전이 정한 '올해의 단어’는 영국판이 ‘큰 사회(Big society)’ 미국판이 '앱(App)'이었다. 미국에서 스티브 잡스가 일으킨 '앱' 붐은 한국에 상륙했지만, 영국에서 데이비드 캐머런이 일으킨 '큰 사회' 붐은 아직 한국 사회에선 낯설다.

영미권에서 '큰 사회'론이 일으킨 반향은 2010년 올해의 단어로 선정될 만큼 상당하다. '큰 사회'론은 정부의 시장 개입에 반대하는 신자유주의, 정부의 시장 조성 기능을 강조하는 케인즈주의의 한계를 뛰어넘는 대안으로 '큰 사회·작은 정부'를 주장한다. 골자는 이러하다.



'공공 부문 적자를 줄이려면 여전히 '작은 정부'는 필요하다. 하지만 사회 문제는 나날이 커지고 있다. 그러니 사회 문제에 혁신적 해결책을 가지고 있는 사회적기업이나 비영리단체 등 사회적 경제가 문제 해소에 참여해 공공과 민간이 함께 '큰 사회'를 이루자.'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가 이를 위해 선택한 방법론은 '사회투자(Social Investment)'였다. 지난 4월 영국 정부는 세계 최초의 사회투자은행 '빅소사이어티캐피털(BSC·Big Society Capital)', 우리말로 '큰 사회 기금'을 출범시켰다. 6억 파운드, 우리 돈 1조200억 원 규모였다.



◇기금 규모 1조 원...세계 최초의 사회투자은행=지난 6월 BSC 사무실에 방문했을 때, 1조 원 기금 운용기관의 소박한 외관에 먼저 놀랐다.

건물은 런던 플리트 가(街)의 이면도로에서도 구석에 자리 잡고 있었다. 사무실 표지판은 작았다. 낡은 엘리베이터는 고장 나, 일행은 좁은 계단을 따라 5층의 사무공간까지 걸어 올라갔다. 사무실 안은 분주했다. 한국의 벤처기업 분위기랄까.

알래스테어 발렌타인(Alastair Ballentyne) BSC 대외협력 담당 이사는 "사회투자 시장에서 우리는 일종의 도매상(wholesaler)"이라고 소개했다. BSC는 사회적기업 등 개별 조직에 직접 자금을 지원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투자 금융기관(Social Investment Financial Intermediaries)들을 지원함으로써 사회투자 시장을 만들어낸다.


사회투자금융이란, 사회적기업이나 사회적 프로젝트에 투자하는 금융을 뜻한다. 예를 들어, 리절츠 펀드(Results Fund) 같은 기관은 프로젝트가 사회적 성과를 많이 낼수록 많은 투자수익을 주는 사회성과 연계채권 같은 사회적 금융상품을 만들어낸다. 임팩트벤처스 영국(Impact Ventures UK)은 사회적기업에 성장기 자본을 공급한다.

밸런타인 이사는 "10년 전에 사회투자시장 조성을 위한 테스크포스팀이 만들어진 이후 비교적 많은 기관들이 생겼지만 아직까지 규모나 실적 면에서는 구멍가게 수준"이라며 "사회투자 시장의 성장 잠재력이 높기 때문에 앞으로 더 많은 기관들이 만들어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진수 한국사회적금융연구원장(왼쪽)과 밸런타인 BSC 이사. ⓒ한국사회적금융연구원↑문진수 한국사회적금융연구원장(왼쪽)과 밸런타인 BSC 이사. ⓒ한국사회적금융연구원
◇구조를 바꾸어내야 사회 혁신=발렌타인 이사는 기금의 역할로 '소셜 임팩트(Social Impact)'를 강조했다. 우리말로 직역하자면 '사회적 영향력'이지만, 의역하자면 '사회 혁신'에 가까운 말이다.

“지역마다, 나라마다 혁신의 대상과 성격이 다릅니다. 유럽에서는 포도를 재배하는 협동조합 농장을 사회적 경제의 주요 영역으로 보지만, 우리는 포도를 잘 키우는 것이 사회 혁신에 큰 도움이 된다고 보지는 않습니다. 영국에서는 사회적 배제(exclusion)의 극복, 지역 발전을 위한 아이디어의 개발과 적용을 통해 지역공동체(Community)를 살리는 것이 혁신의 중심과제입니다."

다시 말해, 사회 혁신이 일어나려면 그 지역공동체에 맞도록 문제 해결 구조를 만들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2010년 9월 발행된 소셜임팩트본드(SIB)가 그러한 예다. 이 채권은 런던 외곽 피터버러 시(市)의 교도소 남자 퇴소자 3000명이 3년 뒤 범죄를 다시 일으키는 비율이 평균 7.5% 이하면 투자자에게 13%의 수익을 제공한다.

어떻게 재범률을 낮추는 대가로 수익을 주는 구조가 나올 수 있었던 걸까. 채권 투자자금은 자활단체와 수감자가족이 전과자가 사회에서 자기 자리를 찾도록 자활을 도와 범죄율을 낮추는 활동을 지원한다. 지방정부는 범죄로 유발되는 사회적 비용을 낮추는 대가를 수익으로 바꿔준다.

이런 구조를 설계하는 데에 법원장과 경찰서장부터 수감자 대표는 물론 자립자활 전문기관, 수감자가족 지원단체 등 이해관계자가 총 동원됐다. 17곳의 투자자가 100억여 원을 투자했다. 관계 기관에 따르면 1년여 만에 기존 예산 중 75% 이상을 절감했으며 재범률은 영국 전체 평균을 크게 밑도는 것으로 전해진다.

◇마중물은 소수의 투자자들이 먼저 부어야=문제는 이런 상품을 만드는 게 어렵고 고비용이라는 데에 있다. 피터버러 시 SIB를 발행하기까지 이해관계자들이 모여서 논의한 기간만 1년6개월이었다. 참여자가 많고 논의기간이 길면 자본조달비용이 높아진다.

전문가도 쉽게 이해하기 어려울 만치 어려운 상품구조 또한 난점이다. SIB가 어떻게 수익을 내고 어떤 투자 리스크를 가지는지 알고 투자할 수 있는 투자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지틴더 콜리(Jitinder Kohli) 딜로이트 이사는 "SIB 등 사회투자 시장을 만드는 데 있어 가장 큰 어려움은 이해하기가 복잡하고 어렵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지난 19일 자본시장연구원 국제회의 참석차 방한한 그는 영국 토니 블레어 총리와 미국 오바마 대통령 정부를 오가며 정책을 자문한 사회투자 전문가다.

대안은 소수의 뜻있는 투자자가 먼저 나서는 것이다. 콜리 이사는 "어떤 투자든 복잡하고 자본조달비용이 높으면 시행되지 않을 것"이라며 "사회투자 초기에는 소수의 전문성과 뜻이 있는 투자자가 모여 사회투자자 클럽을 만들고 자금을 전문적으로 제공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것이 영국 정부가 은행권 휴면예금과 기부금을 모아 BSC를 설립한 이유이기도 하다.

콜리 이사는 사회투자가 어려워도 가야 할 길이라고 강조했다. 그는 "사회투자는 토니 블레어 총리의 노동당 정부가 시작해 미국 민주당의 오바마 정부가 받아들이고 영국 보수당의 캐머런 총리가 채택한 것"이라며 "어느 정당인가와 상관없이 채택하고 있는 대안"이라고 말했다.
↑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 AFP=News1↑데이비드 캐머런 영국 총리 ⓒ AFP=News1
◇670억여 원으로 첫 투자 시작=지난 9월 13일, BSC는 3700만 파운드, 우리 돈 673억여 원의 기금을 배분했다. 사회성과연계채권 등 사회적 금융상품을 만드는 리절츠 펀드와 사회적기업에 투자하는 임팩트벤처스 영국에 각 1000만 파운드를, 국립과학기술예술기금(NESTA)의 혁신투자펀드에 800만 파운드를 배정했다. 밸런타인 이사는 "계속해서 사회투자 시장을 자극해야 한다"고 말했다.

"씨를 뿌려도 자라는 것이 거의 없거나 모두 죽어버리는 조건에서 계속해서 씨를 뿌릴 수 있는 용기와 신념이 필요합니다. 우리는 사회투자시장 조성이 다소 오래 걸릴지 모르지만 꽃은 반드시 피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팁] 빅소사이어티캐피털 설립과정 (자료 : 한국사회적금융연구원, 사회적경제센터)
▷2000년 정부 주도로 '사회투자시장 조성을 위한 테스크포스팀(SITF)' 구성
▷2005년 사회투자를 목적으로 독립 민간위원회(Commission on Unclaimed Asset) 설립.
▷2007년 민간위원회, 휴면예금을 재원으로 한 사회투자은행 설립 보고서 제출
▷2008년 휴면예금법(the Dormant Bank & Building Society Account Act) 제정
▷2010년 영국 정부, 휴면예금을 활용한 빅소사이어티뱅크(Big Society Bank) 추진
▷2011년 민관 합동위원회, 설립계획서 제출. 빅소사이어티기금(Big Society Capital)으로 명칭 변경.
▷2012년 영국 금융감독청 정식인가 및 출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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