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게 때문에 사랑의 상대가 이 사람도 되고, 저 사람도 될 수 있으며 특정 남자, 특정 여자를 사랑하는 게 아니라 우리는 ‘사랑’을 사랑한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따라서 내가 사랑하는 것은 그 상대방이 아니라 바로 ‘나’라는 것이다.
작가의 분석은 이렇다. 풍요롭다 가난하다 등의 개념은 상대적이라는 것이다. 나는 사실 어느 정도 풍요롭게 사는데도 상대방이 좀 더 여유 있게 산다면 나는 박탈감을 느끼고 스스로를 빈곤층이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실제적 궁핍은 급격하게 줄었지만 그래서 역설적이게도 궁핍감과 궁핍에 대한 공포는 외려 늘었다”는 것이 그의 지적이다.
한국 대표 기업들의 역할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여수 엑스포사업을 주도한 것도 바로 이들 대기업이다. 런던 올림픽의 뛰어난 성과도 삼성 현대차 SK 한화그룹 등의 헌신적 뒷받침이 없었다면 가능했을지 의문이다.
그런데도 왜 국내 대표 기업들은 늘 공격을 받을까. 정치권은 삼성전자 같은 기업의 경영권까지 위협하는 금산분리 방안을 왜 내놓을까. 법원은 대기업 총수의 횡령 및 배임시 집행유예를 금지하겠다는 정치권의 법제정 움직임에 화답이라도 하듯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을 1심판결에서 법정구속까지 시켰을까. 왜 우리나라 국민들은 절반 이상이 반기업 정서를 가질까. 심지어 삼성이 대통령보다 더 강하다는 생각까지 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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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의문들에 대한 답은 정치에서 찾아야 한다. 지금의 글로벌 경제위기는 자본주의의 위기가 아니라 민주주의의 위기다. 지금의 경제위기는 시장의 실패가 아니라 정부의 실패가 근본 원인이다. 새누리당이 앞장서고 있는 경제민주화 요구는 연말 대선을 앞둔 정파적 득표 전략이다. 삼성 현대차 SK 한화 같은 대기업을 때려서 99%의 표를 끌어 모으기 위한 것이다.
삼성은 대통령보다도 더 강한 괴물이 아니라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자 애플과의 소송으로 천문학적 숫자의 돈을 물어내야 하는 고단한 처지의 한국기업일 뿐이다.
실제로 우리들은 반기업 반삼성 반현대차 반SK 반한화가 아닌데 그렇게 생각하도록 세뇌당하고 있다. 경제가 죽으면 민주주의도 죽는다는 사실은 말하지 않고 경제민주화만 외친다.
다시 알랭 드 보통의 이야기로 돌아가면 작가는 “이 세상에서 부유한 사람은 상인이나 지주가 아니라 밤에 별 밑에서 강렬한 경이감을 맛보는 사람”이라고 단언한다.
당신은 누구 말에 공감하는가. 한국의 선동 정치인, 아니면 알랭 드 보통. 행복이냐 불행이냐는 전적으로 당신 선택에 달렸다. 1%를 때리는 것으로 당신의 행복은 오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