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날 믿으라"던 드라기, 사실상 빈손..시장 실망

머니투데이 뉴욕=권성희 특파원 2012.08.03 03: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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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합)

마리오 드라기 유럽중앙은행(ECB) 총재가 2일(현지시간) 약속을 지키지 못해 전세계 투자자들을 실망시켰다.

시장이 기대했던 대로 유로존 위기국의 자금조달 비용을 낮춰주기 위해 이들 국가의 국채를 매입할 수 있다고 말했으나 유럽의 구제기금인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이 나선 다음에야 행동하겠다는 입장을 분명히 했다.

드라기 총재는 이날 ECB 통화정책회의가 끝난 뒤 기자회견 모두발언에서 "정책위원회는 중기적인 물가 안정이라는 임무 내에서, 그리고 통화정책을 결정하는데 있어서 독립성을 지키면서 뚜렷한 공개시장 조작을 시행할 수 있다"고 밝혔다.



하지만 드라기 총재는 자금조달 급등으로 어려움을 겪는 국가들이 유럽재정안정기금(EFSF)와 유로안정화기구(ESM) 등 유럽 구제기금에 먼저 국채 매입을 요청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모두발언에서 "이례적인 금융시장 환경과 금융 안정성에 대한 리스크가 존재할 때 정부는 국채시장에서 EFSF/ESM을 활성화할 준비를 해야 한다"며 "아울러 기존 가이드라인에 부합하는 엄격하고 효과적인 조건"들을 받아들여야 한다고 지적했다.



드라기 총재는 질의응답시간에도 "우선 모든 정부는 EFSF에 먼저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며 "ECB는 정부가 재정 측면에서 해야 할 일을 대신할 수 없다"고 강조했다.

드라기 총재의 기자회견 뒤 스페인 마드리드에서 회담을 가진 이탈리아와 스페인 총리들은 ECB의 노력을 높이 평가한 뒤 현재로선 이탈리아와 스페인 모두 유럽의 구제기금에 자국 국채를 사달라고 요청할 의도가 없다고 밝혔다.

드라기 총재는 즉각 시장에 개입하겠다는 뜻은 밝히지 않았지만 "정책위원회는 통화정책 전달성을 고치는데 요구되는 정도에 따라 추가적인 비전통적 통화정책 수행을 고려할 수 있다"고 밝혔다. 또 "수주일 내에 우리는 그러한 정책 조치에 대한 적절한 모형을 설계할 것"이라고 말했다.


또 ECB가 유로를 보호하기 위해 모든 조치를 취해야 하고 이러한 조치를 마련하는데 대해 ECB 정책위원회가 "한 사람의 예외도 없이" 동의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분데스방크와 (옌스) 바이트만 총재가 국채 매입 프로그램에 대해 유보적인 것은 분명하다"고 인정했다.

드라기 총재는 아울러 "선순위에 대한 민간 투자자들의 우려가 해소될 것"이라고 말해 민간 투자자들에 대한 ECB의 채권 선순위 조건을 포기하겠다는 뜻을 시사했다.

민간 투자자들은 보유하고 있는 국채가 ECB에 비해 채무 상환 순위가 밀릴 것이란 우려 때문에 일단 ECB가 개입한 국채에 대해서는 다시 매수하기를 꺼렸다. 이는 기존 ECB 국채 매입 프로그램의 효율성을 떨어뜨리는 요인으로 지목됐다.

드라기 총재는 ESM에 은행 면허를 부여해 ECB 자금에 접근할 수 있도록 하는 방안에 대해서도 일축했다. ESM에 대한 은행 면허 부여는 독일을 비롯한 유로존 핵심국가들이 반대하는 사안이다.

드라기 총재는 ESM에 대한 은행 면허 부여와 관련, "ECB의 소관이 아니다"라며 "현재 ESM 구조는 (ECB의) 적절한 거래 당사자로 인식되도록 허락되지 않는다"고 말했다.

그는 지난주 자신이 "유로를 보호하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조치를 다할 것"이라고 말한데 대해 부담을 느끼는 듯 "엄청난 관심이 쏟아져 놀랐다"고 고백했다. 드라기 총재는 당시 "조치는 충분할 것이다. 나를 믿으라"고까지 말했으나 결국 시장만 실망시킨 셈이다.

드라기 총재는 모두 발언에서 "유로화가 뒤집힐 수 있다는 두려움과 관련된 리스크 프리미엄은 용납할 수 없으며 기본적인 방법으로 해결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이날 마리오 몬티 이탈리아 총리와 마리아노 라호이 스페인 총리도 이날 유로존 위기와 양국의 자금조달 비용 상승에 대해 논의했다.

몬티 총리는 드리가 총재의 기자회견을 전해들은 뒤 이탈리아가 국채수익률을 낮추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것은 "시기상조"이며 그럴 "의도도 없다"고 말했다.

라호이 총리는 3번이나 유럽 구제기금에 국채 매입을 요청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았으나 ECB가 비전통적인 조치를 고려하고 있다는 점에 대해서만 치하하며 답을 피했다. 그는 드라기 총재의 발언에 "내 관점에서 이는 매우 긍정적인 선언"이라고 말했다.

드라기 총재는 이번주 ECB 정책위원들을 만나 EFSF가 발행시장에서 국채를 산 뒤 ECB가 2차 유통시장에서 국채를 매입해 EFSF의 조치를 지지하는 방안을 지지해달라고 설득했다.

유로존 정상들은 지난 6월말 회의에서 EFSF와 ESM이 회원국 정부의 국채를 직접 매입하는 방안에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다만 EFSF의 국채 매입은 유럽연합(EU) 집행위원회가 정한 재정적자 목표치를 달성하고 구조개혁에 합의해야만 가능하다는 조건이 붙는다.

결국 ECB에 중요한 것은 이러한 국채 매입이 각국 정부가 구조 개혁을 이행한다는 조건에서만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는 ECB의 과거 국채 매입과 차이가 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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