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이과 다배운 잡스, 한국은 15살에 결판?

머니투데이 실리콘밸리=유병률 특파원 [email protected] 2012.07.30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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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병률의 체인지더월드]

스티브 잡스가 고등학교 때에는 수학에 월등했고, 대학에서는 컴퓨터공학을 전공했다고 생각한다면 오산이다. 이미 많이 알려진 대로, 리드칼리지 시절 그의 전공은 철학과 물리학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문과인가, 이과인가?

대학을 6개월 만에 자퇴하고 1년여 학교 근처에서 어영부영하던 시절, 그가 주목한 것은 리드칼리지 내 게시판과 벤치 등에 쓰여있는 글씨체. 그는 이 대학의 평생교육강좌를 들으며, 서체(calligraphy) 공부에 몰두했다.



그는 "그때 서체수업을 듣지 않았다면 PC에는 오늘날처럼 아름답고, 뛰어난 글씨체가 없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렇다면 이 경우, 스티브 잡스가 공부해 매킨토시에 적용한 서체는 이과인가, 문과인가?

스티브 잡스는 2010년 1월 아이패드를 선보이는 자리에서 "인문학과 기술이 만나는 지점에 애플이 존재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스티브 잡스는 2010년 1월 아이패드를 선보이는 자리에서 "인문학과 기술이 만나는 지점에 애플이 존재한다"고 강조하기도 했다.


마크 저커버그는 고등학교시절 컴퓨터 프로그래밍에 재능을 보였지만, 고전문학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하버드대에서도 그의 전공은 컴퓨터공학과 함께 심리학. 그는 "사람들이 나를 컴퓨터공학 쪽 사람으로 보지만, 나는 심리학과 컴퓨터공학이 연결되는 지점에 흥미를 느꼈다"고 말한다. 페이스북이 어떻게 등장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렇다면 그는 과연 문과인가, 이과인가.



래리 페이지는 대학에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했지만, 고등학교 시절 재능 있는 음악가로 선정돼 예술명문 인터로첸 예술아카데미에서 여름학기를 다니기도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색소폰을 연주했다.

또 영화 '아이언맨'의 실제모델이자, 인터넷결제회사 페이팔, 전기자동차회사 테슬라, 우주선회사 스페이스엑스 설립자인 엘론 머스크의 대학전공은 경제학과 물리학이었다. 그렇다면 이들은 문과인가 이과인가.

문과도 아니고, 이과도 아니다. 더 정확하게 말하면 이들이 다닌 미국 고등학교와 대학에는 문과, 이과라는 게 없다. 관심이 있고, 능력만 되면 학문간 경계 없이 공부할 수 있다. 대학전공이라는 것도 1년쯤 다닌 뒤, 어떤 쪽 과목을 더 많이 이수를 했느냐로 정해진다.


↑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AFP=뉴스1]↑마크 저커버그 페이스북 창업자 [AFP=뉴스1]
문과, 이과 이분법은 한국, 일본 등에만 있을 뿐이다. 그것도 자신이 무엇을 잘하는지 알 수도 없고, 알아도 틀린 경우가 대부분인 나이에 문과, 이과를 결정해야 한다. 진로를 정할 수도 없는 시기에 진로를 결정해야 하니, 한국의 청소년들은 대대로 불행했다. 그래서 대부분은 수학 못하면 문과, 국어 못하면 이과였다.

대학에 가서도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컴퓨터공학을 전공하고, 철학과 물리학을 함께 전공한다는 건, 상상할 수 없는 광경이다.

과거에는 이런 이분법의 결함이 잘 드러나지 않았다. 개발시대에만 해도 문과 출신들이 계획하고, 관리하고, 이과 출신들이 선진국 상품을 열심히 좇아 만들면 문제될 게 없었다. 오히려 효율적이기도 했다. 그때만 해도 이런 이분법이 한국의 창의력을 그렇게 갉아먹을 줄 미처 몰랐다.

오늘날 혁신이 어느 지점에서 돌출하는지 한번 보시라. 순수 문과의 영역에서? 순수 이과의 영역에서? 아니다. 오늘날 혁신과 진보는 문과도 이과도 아닌 영역에서, 문과인 동시에 이과인 영역에서 튀어나오고 있다. 아이폰이 그렇고, 페이스북이 그렇고, 카카오톡도 그렇다. 이들 제품은 과연 이과의 작품인가, 문과의 작품인가?

그래서 클린턴 행정부에서 노동부 장관을 지낸 로버트 라이시는 <부유한 노예>에서 "사람들은 신경제의 혁신가들이 마치 새로운 정보기술, 컴퓨터 사용에 능숙한 사람들이라고 오해를 하고 있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는 위대한 혁신가는 '엔지니어와 예술가처럼 특정분야에서 새로운 가능성을 찾고 개발하는 데서 기쁨을 느끼는 사람인 동시에, 마케팅전문가와 컨설턴트처럼 사람들이 갈망하고 필요로 하는 것을 관찰하고 알아낼 줄 아는 사람'이라고 했다.

스티브 잡스가 인간에 대해 깊이 고민하지 않았다면, 그리고 게시판의 서체를 눈여겨보지 않았다면, 아이폰과 아이패드도 그냥 복잡한 기능들의 조합이 됐을지도 모른다.

한국이 만15세가 되면 문과인지, 이과인지, 자신의 평생 경계를 그어버려야 하는 현실이 바뀌지 않는다면, 한국의 스티브 잡스는 기대하기 힘들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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