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년전 코르크 마개 팔던 獨 中企, 지금은?

머니투데이 프랑크푸르트(독일)=정진우 기자 2012.04.10 06: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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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로존 극과 극' 그리스·독일을 가다⑥-1]기업 강국 독일, 정치가 키웠다

↑ 독일 벤즈하임에 있는 사너 공장 전경ⓒ정진우 기자↑ 독일 벤즈하임에 있는 사너 공장 전경ⓒ정진우 기자


# 지난달 22일 독일 프랑크푸르트에서 자동차를 타고 남쪽으로 1시간 달려 도착한 벤즈하임 쉴러가 76번지. 조용한 시골 마을인 이곳에 들어서자 'SANNER'란 글자가 큼직하게 적힌 건물이 눈에 띄었다. 기자가 이날 방문하기로 한 플라스틱 용기 제조회사 사너(SANNER) 본사였다. 겉보기엔 특별한 게 없었지만, 무려 118년(1894년 설립)이나 된 장수 기업이었다.

공장에선 쉴 새 없이 작은 플라스틱 병을 찍어냈다. 병원에서 쓰이는 작은 약통이었다. 건강식품을 담는 플라스틱 통도 만들어지고 있었다. 이 회사는 독일 본사(220명)를 비롯해 미국과 중국, 헝가리 등 각 지사(150여 명)에서 연간 20억 개에 달하는 크고 작은 플라스틱 용기와 뚜껑을 제조하고 있다. 사너의 매출(2010년)은 4200만 유로(623억 원), 순이익은 370만 유로(55억 원)의 탄탄한 회사다. 특허도 수 백 건에 달할 만큼 기술력도 인정받고 있다.



↑ 사너 공장 내부 기계 모습. 이곳에선 각종 플라스틱 용기와 뚜껑을 제조하고 있다.ⓒSANNER↑ 사너 공장 내부 기계 모습. 이곳에선 각종 플라스틱 용기와 뚜껑을 제조하고 있다.ⓒSANNER
공장과 붙어있는 사무동 건물 3층 사장실로 올라가는 계단 한쪽엔 나무를 자르고 다듬어 코르크 마개를 만드는 기계가 놓여 있었다. 이 회사가 오래전엔 코르크 마개를 생산했던 회사라는 걸 암시했다. "지금도 코르크 마개를 만드냐"는 질문에 홀거 프랑크 사너 사장(CEO)은 "1950년대까지 사너는 코르크 제조업체로 독일에서 잘나가는 회사였는데 플라스틱 용기 전문회사로 변신하는데 성공했다"며 "시대가 바뀌면서 우리도 주력 제품을 전환했다. 지금도 새로운 기능을 접목시켜 뚜껑에 방부제가 들어가는 약병 등 신제품을 만들고 있다"고 답했다.

↑ 홀거 프랑크 사너 CEOⓒ정진우↑ 홀거 프랑크 사너 CEOⓒ정진우
이 회사는 4대째 이어져 오고 있는 가족 기업인데, 프랑크 사장은 전문경영인으로 2008년부터 사장을 맡고 있다. 그에게 118년 동안 장수하는 비결을 묻자, 프랑크 사장은 "기업이 한 가지 기술이라도 전문성을 제대로 갖추고, 한 눈 팔지 않으면 장수할 수 있다"면서 "시대의 흐름을 빨리 읽고 적절하게 대처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정부를 비롯한 정치권의 기업 육성 의지가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했다. 아무리 기업이 기술을 갖고 인재를 끌어 모은다고 해도, 제도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힘들다는 것. 프랑크 사장은 "독일 정부와 정치권이 탄탄한 중소기업을 키우기 위해 정책적으로 기업할 수 있는 여건을 잘 만들어줬다. 세금 부담을 줄여줬고 쓸데없는 규제도 없애줬다"며 "지금 독일 경제가 굳건한 건 정부의 이런 지원을 토대로 사너 같은 수 백 만개의 중소기업이 성장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 독일 담슈타트 인근 공장밀집지역에 위치한 아카솔 엔지니어링 공장 전경ⓒ정진우 기자↑ 독일 담슈타트 인근 공장밀집지역에 위치한 아카솔 엔지니어링 공장 전경ⓒ정진우 기자
# 사너 본사에서 자동차를 타고 다시 프랑크푸르트 방향으로 30분쯤 달려 도착한 담슈타트 공장 밀집지역. 이번엔 아카솔 엔지니어링(AKASOL Engineering)이란 회사를 찾았다. 직원 50명의 중소기업이었다. 공장에는 전기자동차 배터리(태양광 전력을 저장하기 위한 리튬이온 배터리 시스템)를 생산하는 각종 시설로 가득 찼다.

아카솔은 작은 회사지만 배터리 시스템 기술력이 뛰어나 벤츠와 같은 대기업의 관심을 한 몸에 받고 있다. 특히 독일 정부의 녹색정책(태양광 등 신재생에너지 육성정책)과 맞물려 주 정부로부터 각종 지원을 받는다. 아카솔이 기술을 개발하면, 정부가 상용화를 돕기도 한다. 지난 2010년 매출은 3200만 유로(470억 원)로 해마다 20∼30%씩 견실한 성장을 이어가고 있다. 앞으로 수년 내 1억 유로(1500억 원) 달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


↑ 펠릭스 폰 보크 아카솔 엔지니어링 사장이 이 회사에서 개발한 전기차 배터리 시스템이 장착된 1인용 차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정진우 기자↑ 펠릭스 폰 보크 아카솔 엔지니어링 사장이 이 회사에서 개발한 전기차 배터리 시스템이 장착된 1인용 차앞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정진우 기자
펠릭스 폰 보크 사장은 "정부가 우리 같이 기술력 있는 작은 회사를 육성하기 위해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며 "기술력만 있다면 주 정부든 연방정부든 돈을 빌리는 데는 큰 문제가 없다. 전 산업에 공정한 경쟁 체제가 갖춰져 있는 만큼 실력 있는 중소기업도 사업 영역을 넓힐 수 있다"고 강조했다.

사너와 아카솔은 독일이 자랑하는 탄탄한 중견·중소기업의 표본이다. 정종태 코트라 유럽지역본부장은 "독일 정부와 정치권에선 중견·중소기업들이 받는 부당한 압력을 해소하기 위해 노력하는데, 이는 결국 중소기업 육성정책으로 이어진다"고 말했다. 그는 "400만 개가 넘는 탄탄한 기업들이 자신들의 영역을 확고하게 구축하고 있다 보니, 글로벌 경제위기가 찾아와도 독일은 별 영향을 받지 않는다"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독일 정부와 정치권의 일관된 중소기업 육성 정책이 독일 경제를 견고하게 다졌다고 분석한다. 가격담합 및 중소기업에 대한 부당한 압력을 차단해 기술력을 갖춘 기업이 성장할 수 있도록 정책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결과 2010년 기준으로 종업원 수 500명 미만, 매출 5000만 유로 미만의 탄탄한 중소기업이 전체 기업의 99%인 400만 개가 넘는다. 이들 중소기업은 독일 기업 전체 매출의 36.9%, 고용의 79.5%, 수출의 19.5%를 책임지고 있다. 이를 바탕으로 독일은 2010년 전체 경제성장률(3.7%)보다 제조업 성장률(12%)이 3배 이상 높았다.

아울러 지난 10년간 독일 정치 개혁에서 비롯된 '라인 자본주의'(Rhine Capitalism)가 독일 기업들의 경쟁력을 높였다는 평가도 있다. 라인 자본주의는 영·미식 자본주의와 대비되는 개념이다. 증시보다는 은행을 중심으로 자본을 조달하고, 연구개발에 장기투자하며, 노사의 사회적 파트너십을 중시한다는 게 골자다.

이밖에 정치권이 앞장서 직업교육이나 연구개발, 투자를 장기적 관점에서 수행하는 등 제조업 중심의 장기 성장 모델을 만들었다는 분석이다. 정희철 한국무역협회 브뤼셀지부장은 "독일의 중소기업 정책은 기술혁신, 창업지원, 해외시장개척, 무역금융지원, 행정 간소화 등에 맞춰져 있다"며 "기업의 경쟁력도 결국 정부와 정치권이 어떤 정책을 마련하느냐에 달렸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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