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車산업 위기]①공장 놀아도 문 못닫아

머니투데이 김국헌 기자 2012.03.09 13: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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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불구경하다가 실기(失期)… 공장 20% 문 닫아야 손익분기점

편집자주 세계 자동차산업의 메카가 미국 디트로이트라면, 자동차의 본고장은 유럽이다. 유럽은 중국, 미국과 함께 세계 3대 자동차 시장으로 군림하고 있다. 하지만 속은 곪을 대로 곪았다. 수요가 5년째 감소해 전체 공장의 1/5을 폐쇄해야 하는 상황이다. 그러나 재정위기 해결만으로도 벅찬 게 유럽의 현실이다. 이러다간 유럽 자동차산업이 공멸할 것이란 극단적 우려까지 나온다. 위기에 빠진 유럽 자동차산업을 3회의 걸쳐 짚어보고 교훈을 찾아본다.

지난 2007년 미국 금융위기로 경영난에 직면한 미국 제너럴모터스(GM)는 유럽사업 구조조정에 착수했다. 유럽사업 20%를 구조조정하고 인력 8000명을 감원할 계획을 세웠지만, 이 사실이 알려지자 유럽 각국이 정부 지원을 미끼로 반대를 했다.

그러나 GM은 지원금 때문에 더이상 구조조정을 미룰 수 없다는 판단 아래 2010년 독일 자회사 오펠의 벨기에 공장을 문 닫았다. 아스트라 모델을 생산했던 벨기에 공장에서는 2600명이 일하고 있었다. 당시 오펠 최고경영자(CEO)였던 닉 라일리 전 한국GM 사장은 그해 실적에서 큰 손실을 낼 것이라며, 공장 폐업은 불가피하다고 밀어붙였다.



이 결정으로 GM은 미국과 유럽에서 동시에 비판을 받았다. 미국에서는 미국인의 세금으로 유럽사업을 구조조정했다고 비난이 일었다. 유럽에서는 지원을 약속했는데도, 유럽인의 일자리를 없앴다며 격렬하게 반발했다.

결국 GM은 당초 계획했던 것보다 유럽사업 구조조정 규모를 대폭 줄여야 했고, 추가적인 공장 폐쇄도 실행되지 못했다. GM의 실패는 유럽 자동차산업이 왜 지금 위기에 봉착했는지를 단적으로 알 수 있는 사례다.



◇유럽, 美 불구경하다가 '발등에 불'

▲ 지난 2000년 이후 유럽연합(EU) 승용차 신규 등록대수(파란 선)와 국내총생산(GDP·빨간 선) 추이. (출처: 유럽자동차공업협회)▲ 지난 2000년 이후 유럽연합(EU) 승용차 신규 등록대수(파란 선)와 국내총생산(GDP·빨간 선) 추이. (출처: 유럽자동차공업협회)


4년 전 유럽은 미국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을 바라보기만 했다. 미국이 크라이슬러를 매각하고 공장을 줄이고 인력을 감축할 때, 유럽은 자동차산업에 돈을 쏟아부으며 규모를 유지하고 구조조정을 피해갔다.

유럽 자동차산업은 지난 2007년 미국 자동차산업이 금융위기로 직면했던 위기와 같은 상황에 처해있다. 다만 미국 자동차산업은 금융위기로 어두운 터널을 거의 다 지나온 반면에, 유럽은 터널 진입로에 서있단 점만 다르다.


IHS 오토모티브에 따르면, 미국 자동차산업은 지난 2007년 금융위기로 5년간 공장수를 64개에서 54개로 줄였다. 이 시기에 미국시장에 진출한 외국 메이커들이 공장을 일부 새로 지었지만, 제너럴모터스(GM), 포드, 크라이슬러 등 미국의 자동차 빅3는 공장 13곳의 문을 닫았다. 당시 GM과 크라이슬러는 파산보호 신청를 낼 정도로 존폐의 위기를 맞았다. 이중 크라이슬러는 2009년 이탈리아 피아트에게 매각되는 등 디트로이트는 엄청난 구조개편을 경험했다.

그러나 같은 기간 유럽연합(EU) 27개국 241개 공장 가운데 문 닫은 곳은 피아트의 시칠리아 공장을 포함해 3곳에 불과하다. 자동차업체들은 정부 보조금과 대출 수혜를 바탕으로 위기를 넘겼지만, 노는 공장들은 유럽 재정위기에 부메랑이 되어 돌아왔다.

뼈아픈 구조조정을 거친 미국과 회피한 유럽의 결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평상시 1600만~1700만대에 달했던 미국 자동차시장은 2007년 1040만대까지 추락, 간신히 1000만대선을 지켰다. 이것이 지난 2011년 1280만대선까지 늘었고, 올해는 1400만대선을 회복할 것이란 기대가 나온다.

반면에 유럽은 올해 5년 연속 신차판매 감소세를 기록할 전망이다. 올해 감소율은 4~5% 수준으로 예상되고 있고, 지난해 EU에서 판매된 신차는 총 1310만대로 4년 연속 감소했고, 유휴설비는 빠르게 증가했다. 유럽 자동차업계에선 이대로 가다간 공멸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가득하다.

◇유럽 車산업 "20% 구조조정해야"

지난 7일 스위스 제네바 모터쇼에서 자동차업계 경영진들은 유럽연합(EU)이 직접 나서서 자동차산업 구조조정의 칼을 빼들어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유럽자동차공업협회(ACEA) 회장을 맡고 있는 세르지오 마르치오네 피아트·크라이슬러 최고경영자(CEO)는 “현재 유럽에서 돈을 벌고 있는 자동차업체는 매우 드문 것이 사실"이라며 “이것은 지속가능하지 않기 때문에 변화해야만 한다"고 주장했다.

르노-닛산 자동차의 카를로스 곤 최고경영자(CEO)는 "모든 자동차업체가 과잉설비 문제를 안고 있어, 일단 한 회사가 생산시설 구조조정을 시작하면 모든 업체가 구조조정을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프라이스 워터하우스쿠퍼스(PwC)의 캘럼 맥래 자동차 담당 애널리스트는 "유럽 자동차산업이 설비가동률을 80%로 낮춰야 본전치기일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 자동차산업의 규모를 생각한다면 20% 구조조정이 얼마나 큰 규모인지 파악할 수 있다. ACEA 집계에 따르면 유럽 자동차산업에 종사하는 근로자는 완성차와 납품업체를 망라해 총 230만명으로, 이 가운데 5분의 1이 일자리를 잃게 된다는 뜻이다. 연관산업 종사자까지 포함하면 자동차산업 관련 근로자수는 총 1270만명에 달한다.

특히 유럽 전체가 공급과잉 상태여서, 일단 실직하면 재취업할 수 없는 현실이 심각한 실업 상태를 초래한다. 피아트 노조 간부인 마리넬라 볼테라는 피아트가 생산을 줄이면 이탈리아 도시 전체가 타격을 입는다고 지적했다.

◇"구제금융 필요없다..공장 닫게 해달라"

▲ GM 유럽법인 오펠의 벨기에 공장▲ GM 유럽법인 오펠의 벨기에 공장
유럽 자동차산업의 구조조정이 시급한데도, 유럽 각국은 여전히 구조조정을 기피하고 있다. 재정위기 장기화로 경제가 어렵고 실업률이 치솟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구조적인 문제로 유럽 자동차산업의 위기가 더 악화될 것이란 우려가 크다.

GM은 10년째 적자에 시달리고 있는 유럽법인 오펠의 공장 몇 곳을 구조조정하기 위해 가능성을 타진하고 있다. 영국 앨즈미어포트, 독일 보훔, 스페인 자라고자가 후보로 거론되자 빈스 케이블 영국 산업경제부 장관은 지난주 미국을 방문해 GM 경영진에게 영국 공장을 계속 가동해달라고 촉구했다.

오토모티브 리서치센터(CAR)의 폴 니웬휴스 이사는 "일자리를 지키고 창출하는 것을 업무로 간주하는 영국과 독일 정부가 공장을 지키기 위해 서로 싸울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자동차업체들은 구제금융보다 공장 폐쇄가 더 낫다는 입장이다. 포드 독일법인의 베른하르트 마테스 대표는 "정부의 원조를 요청하는 것이 전혀 아니다"라며 "기업의 구조조정은 개별기업 차원에서 이루어져야한다"고 주장했다.

유럽 정부의 압박에 공장 폐쇄 대신에 생산라인을 함께 사용하는 대안을 찾기도 했다. PSA 푸조·시트로엥의 필리프 바랭 CEO는 "(공급과잉 문제로) 같은 공장에서 푸조와 시트로엥을 생산하고 있고, 미래에는 GM과도 설비를 함께 사용할 것"이라고 밝혔다. 위기를 절감한 푸조와 GM은 최근 얼라이언스를 공식 발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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