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종면칼럼]최태원 회장 사건이 던지는 질문

머니투데이 박종면 더벨대표 2012.01.09 06:17
글자크기
재즈를 광적으로 좋아하는 일본작가 무라카미 하루키의 ‘잡문집’을 읽다가 그 책에 소개된 1930년대 미국의 전설적인 재즈 여가수 빌리 홀리데이가 부른 노래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해(I can't get started with you)’를 알게 됐다.

쓸쓸하지만 따뜻하고 촉촉하게 감기는 빌리 홀리데이 노래의 매력은 말할 필요도 없지만 가사가 세련되고 로맨틱하다.



"나는 비행기로 세계일주 여행도 했다/북극점도 답파했다/1929년에 나는 주식을 최고가로 팔아넘겼다/영국에 가면 왕실의 초대도 받는다/그런데 네 앞에만 서면 내 마음이 너무 아프다/왜냐하면 난 네게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니까.”

사랑하는 사람 앞에만 서면 아무 말도 못한다는 감성적인 이 노래를 들으면서 나는 ‘SK그룹 최태원 회장 형제 횡령사건’이 생각났다. 왜 그랬을까.



최태원 회장은 재계 서열 3위의 SK그룹 총수다. 개인 주식 가치만 3조원이 넘는다. 1998년 경영권을 물려받았을 때 37조원에 불과하던 그룹 매출을 지난해에는 110조원까지 늘렸다. SK 관계자들의 말처럼 최 회장은 이제 단순히 대주주 경영인이 아니라 그 자신이 그룹의 성장 동력이다.

그런 최 회장이지만 유독 어떤 문제만 나오면 ‘차마 말을 꺼내지 못하는’ 게 있다. 바로 지배구조다. 최 회장의 아킬레스건이다.

최태원 회장은 1998년 최종현 회장의 별세로 경영권을 물려받았지만 700억원대의 상속세를 낼 돈이 없어 2003년까지 5년간 분납했다. 또 2003년 해외 투자펀드 소버린으로부터 경영권을 위협받자 수 백 억원의 빚을 내 SK(주)의 지분을 사들이는 노력 등으로 어렵게 방어했다.


SK는 시스템 통합업체인 SK C&C를 설립해 최 회장이 이를 지배하고, 다시 SK C&C가 그룹 지주회사격인 SK(주)를 지배하는 방식으로 지배구조를 만들었지만 안정적으로 끌어가려면 지주사격인 SK(주)와 SK C&C의 합병 등 과제가 많다. 사촌간 계열분리도 장기적으로 풀어야 할 숙제다.

충분한 돈만 있다면 지배구조 문제는 간단히 해결할 수 있겠지만 불행하게도 최태원 회장은 그렇지가 못하다. 지배구조가 취약한 상황에서 기존의 주식을 팔수도 없다. 따라서 다른 생각을 할 수 밖에 없고, 외부에서 방법을 찾으려 이런 저런 시도를 하게 된다. 이번에 문제된 선물투자는 이렇게 시작된 것이다. 2003년 최 회장이 구속되는 상황까지 갔던 SK그룹 분식회계 사건의 뿌리도 따지고 보면 사실은 취약한 지배구조에 있었다.

한국경제의 비약적 성장에는 SK를 비롯한 삼성 현대차 LG등의 오너경영이 크게 기여했고, 이것은 다시 안정된 지배구조가 있었기에 가능했다. 그럼에도 치러야 할 대가가 결코 만만치 않다는 사실을 이번 최 회장 사건이 보여주고 있다. 물론 SK만이 아니고 삼성과 현대차도 이미 ‘에버랜드 CB 헐값 매각사건’과 ‘글로비스 사건’ 등을 통해 톡톡히 대가를 치렀다.

문제는 앞으로 한국의 대표기업들이 안정된 오너체제와 지배구조를 유지하기가 점점 더 어려워졌다는 사실이다. 상속세법이 2004년 열거주의에서 포괄주의로 바뀌면서 대기업의 상속세율은 세계최고 수준인 50%까지로 높아졌다. 게다가 올해부터는 ‘일감몰아주기’에 대한 과세가 시행돼 SK C&C나 글로비스 같은 방식으로 지배구조를 만드는 것도 어렵게 됐다.

한국경제 성장의 견인차였던 오너경영은 앞으로 어디로 가나. 이번 SK 최태원 회장 형제 사건이 한국경제에 던지는 물음이다.

그런데 최태원 회장은 재즈를 좋아하나. 그가 빌리 홀리데이의 노래를 한번 들어봤으면 좋겠다.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