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도, R&D도, 백만장자도 선진국 떠나 신흥국으로

머니투데이 권성희 기자 2012.01.01 08: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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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의 지도가 바뀌고 있다]<1-2>2020년엔 세계 6대 경제국에 브릭스 모두 포함

"유럽의 국가재정 및 금융 개혁이 성공을 거두기를 희망한다."(후진타오 중국 국가주석)
"중국이 유럽 경제와 유로화에 대해 신뢰를 보내준 것에 감사한다."(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

지난해(2011년) 8월25일, 사르코지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후 주석과 나눈 대화의 일부다. 중국이 유럽의 재정위기 상황을 걱정하며 개혁을 촉구하자 사르코지 대통령은 지속적인 신뢰를 부탁한다며 감사를 표하는 모앙새다.



중국이 고개 숙인 유럽의 어깨를 두드리는 모습이 연상되는 이러한 상황은 최근 반복해 벌어졌다. 절정은 지난해 11월 3~4일 프랑스 칸에서 열린 주요 20개국(G20) 정상회의 자리였다.

후 주석은 버락 오바마 대통령을 포함한 나머지 정상들이 모두 자리를 채운 뒤에야 마지막에 등장해 주최국인 프랑스 사르코지 대통령의 옆 자리를 채웠다. 세계 경제를 호령하는 19개국 정상들이 후 주석의 등장을 기다리는 모양이 됐다.



다소 오만해 보이는 후 주석의 이런 태도에도 불구하고 G20의 주인공은 오바마 대통령이 아니라 후 주석이었다. 어디를 가나 후 주석은 환대를 받았다. 물론 경제위기에 처한 유럽으로선 세계 최대 외환보유액을 자랑하는 중국의 재정적 지원이 절실했다.

하지만 후 주석은 '돈 많은' 중국에 쏠린 간절한 유럽의 시선을 우아하게 외면했다. "유럽은 스스로 부채 문제를 해결할 지혜와 능력을 갖추고 있다고 믿는다"는 것이다.

후 주석과 달리 오바마 대통령은 유럽에 훈수를 두고 싶었지만 말발이 먹히지 않았다. 미국도 계속되는 재정적자와 눈덩이처럼 쌓여가는 국가부채에 한 푼이 아까운 마당에 비슷한 처지의 유럽에 조언이라니 '도긴개긴'(거기가 거기라는 뜻)이었다.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총리는 이런 미국을 향해 지난해 "기생충"이라고 비난해 전세계적인 화제를 모았다. 논란이 커지자 푸틴 총리는 지난해 10월13일 중국 CCTV와 가진 인터뷰에서 "미국은 기생충이 아니지만 미국 달러 독점체제는 기생충"이라며 나름 비난의 수위를 낮췄다.

◆신흥국의 부상-선진국의 쇠락..결국 부의 이동=국제사회에서 나타나고 있는 신흥국과 선진국의 위상 변화는 뚜렷하다. 브릭스로 통칭되는 브라질, 러시아, 인도, 중국이 재정위기에 빠진 유럽을 지원할지 여부가 세계적인 경제전문지 파이낸셜 타임스(FT)의 머릿기사가 될 정도로 신흥국의 입지는 올라갔다.

돈도, R&D도, 백만장자도 선진국 떠나 신흥국으로


이같은 국제 역학구도의 변화 뒤에는 부의 이동이 자리하고 있다. 세계 최대의 채권운용사 핌코의 모하메드 엘-에리언 최고경영자(CEO)는 이를 "갑자기 세계가 뒤집어졌다"고 표현하며 '부유한' 국가들은 대규모 적자를 내면서 일부는 순채권국에서 순채무국으로 전락한 반면 '가난한' 국가들은 흑자를 내며 대외자산을 쌓아가고 있다"고 지적했다.(세계 석학들의 기고 전문사이트인 프로젝트 신디케이트, 2011년 12월21일)

엘-에리언은 이런 변화의 원인을 신흥국들이 지속적으로 경상수지 흑자를 유지하며 부채를 줄이고 위기에 대비해 외환보유액을 쌓은 반면 선진국들은 금융혁신이란 이름으로 제조업에 비해 금융을 과다하게 키우면서 부채를 확대한 데서 찾았다.

선진국의 퇴보와 신흥국의 약진으로 부의 지도가 바뀌고 있다는 사실은 국내총생산(GDP)에서 확인할 수 있다. 영국의 경제연구소인 경제경영센터(CBER)는 2020년에는 세계 경제규모 1~6위를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 인도, 브라질이 차지할 것으로 예상했다. '선진국(미국, 일본) 2개국 + 브릭스 4개국'의 구도이다. 이제 8년 후면 유럽 국가들은 경제규모에서 모두 브릭스에 밀려나게 된다.

골드만삭스가 지난 2008년에 발표한 글로벌 경제전망에 따르면 2050년에는 GDP 순위가 중국, 미국, 인도, 브라질, 러시아, 인도네시아, 멕시코 등의 순으로 바뀔 것이라고 전망했다. 미국이 2위로 밀려날 뿐만 아니라 세계 7대 경제국이 미국을 제외하고는 모두 신흥국이 될 것이란 예상이다.

HSBC도 지난해 12월 발표한 자료에서 2050년에는 전세계 30대 경제국 가운데 19개국이 현재의 신흥국이 될 것이며 이들 19개 신흥국들이 선진국들의 경제 모임인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보다 훨씬 더 중요해질 것이라고 밝혔다.

스페인 에사데(ESADE) 경영대학원의 자비에르 산티소 교수는 "이미 전세계 GDP의 40%, 전세계 외국인 직접투자(FDI)의 37%를 신흥국이 점하고 있다"고 지적했다. 특히 아시아는 지난 30년간 연평균 5%씩 성장했으며 2050년에는 GDP가 30조달러에서 230조달러로 늘어날 것으로 예상된다.

내일을 위한 글로벌 연구소(GIFT)의 설립자이자 '소비경제학(Consumptionomics)'의 저자인 챈드런 나이르는 21세기는 서양에서 동양으로 경제적, 사회적, 정치적 힘의 균형이 이동하는 '아시아의 세기'라고 선언했다.

◆신흥국의 모순? 부의 지도 변화는 필연=고성장, 낮은 부채비율과 재정적자 비율, 풍부한 외환보유액 등 신흥국이 가진 경제적 강점을 인정하면서도 일각에선 신흥국 경제의 지속 가능성에 대해 의문을 제기한다.

안정적인 고성장을 지속하기엔 정치적 자유 제한, 막강한 공무원의 권한, 부정부패, 빈부격차 등 내부의 모순이 만만치 않다는 지적이다. 하지만 이같은 모순은 산업화 초기 유럽과 미국도 비슷하게 겪은 문제들이다.

신흥국의 경제적 부상에 대해 국가 전체의 경제규모인 GDP, 즉 외형만 커졌지 국민이 얼마나 부유한지 보여주는 1인당 국민소득은 여전히 선진국과 격차가 크다는 지적도 있다.

이 역시 GDP가 커지면 1인당 국민소득도 시차를 두고 점차 올라간다는 점과 1인당 국민소득으로 국가의 부를 논하는 것은 한계가 있다는 점을 염두에 둬야 한다. 예를 들어 국제통화기금(IMF) 집계에 따르면 지난해 구매력 기준으로 1인당 국민소득을 보면 카타르, 룩셈부르크, 싱가포르, 노르웨이, 부르나이 순이다.

아울러 신흥국의 경제적 부흥이 단순히 국가 주도로 이뤄진 부의 형성은 아니란 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사데의 산티소 교수는 신흥국의 경제 규모가 커지며 부가 늘어나고 있는 주요원인 중 하나로 신흥국 기업들의 혁신을 꼽았다.

인도의 자동차회사 타타는 유럽 경쟁업체보다 75% 저렴한 가격으로 자동차를 판매할 수 있으며 중국 민드레이는 서구 경쟁업체의 10% 비용으로 의료장비를 개발했다. 브라질의 엠브라에르는 가장 효율적인 항공기 제조기술로 전세계 중소형 항공기 시장을 석권했고 멕시코의 세멕스는 선진국의 성장 기법인 인수·합병(M&A)를 통해 세계 최대의 시멘트회사로 떠올랐다.

◆R&D도, 백만장자도 선진국에서 신흥국으로 중심이동
산티소 교수는 "신흥국 기업들은 고부가가치 산업과 기술우위 산업에서도 앞서 나가고 있다"며 "OECD 기업들이 신흥국 기업에서 혁신을 재수입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미국 경제지 포춘이 집계한 500대 OECD 다국적 기업 가운데100여개사가 연구개발(R&D) 센터를 신흥국, 주로 중국과 인도에 두고 있다. GE의 가장 큰 R&D 센터는 인도에 있으며 IBM은 미국보다 인도에서 더 많은 직원을 고용하고 있다. 마이크로소프트(MS)가 중국 베이징에 세운 R&D 센터는 미국 본사 다음으로 크다. 독일의 지멘스는 R&D센터 전체 직원 3만명 가운데 12%가 신흥국 아시아에 있다.

1990년만 해도 전세계 R&D의 95%가 선진국에서 이뤄졌으나 2000년에는 선진국 비중이 76%로 줄었다. 현재는 신흥국이 R&D 연구자들의 40%를 차지하고 있다. 유네스코에 따르면 중국은 매년 GDP의 2.5%인 1000억달러를 R&D에 쓰고 있으며 중국 연구자들의 숫자는 거의 미국과 유럽에 육박하고 있다.

중국은 조만간 R&D에서 유럽은 물론 미국까지 앞설 것으로 예상되는데 이는 지난해 중국 대학생들의 40%가 이공계 출신으로 미국의 두 배가 넘는다는 점에서 확인할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특허기술에서 결과로 드러나고 있다. 세계지적재산권기구(WIPO)에 따르면 중국은 지난해 미국과 일본을 꺾고 세계 최다 특허 출원국으로 올라섰다. 또 지난해 중국의 통신장비회사인 ZTE와 후아웨이는 특허권 출원 규모에서 각각 2위와 4위를 차지했다. 1위는 일본 파나소닉, 3위는 미국 퀄컴이었다.

세계적인 경쟁력을 갖춘 혁신기업들이 신흥국에서 늘어나면서 신흥국 부자들도 급증하고 있다. 미국 투자회사인 메릴린치와 컨설팅회사 캡제미니가 매년 발표하는 세계 부 보고서에 따르면 2010년말 기준으로 아시아·태평양 지역의 백만장자만 330만명으로 유럽(310만명)을 앞섰다. 미국(340만명)과 격차도 크게 줄었다.

이처럼 전세계 부의 중심은 GDP 규모뿐만 아니라 기업의 양적, 질적 수준과 백만장자의 숫자에 있어서도 북미와 유럽에서 남미와 아시아로 이동하고 있다.

러시아, 아시아, 남미는 모두 1990년대에 경제위기를 겪었다. 신흥국들은 이 위기를 계기로 오히려 균형재정과 부채 축소, 외환보유액의 중요성을 뼈저리게 배울 수 있었고 덕분에 경제의 기초체력을 단단히 다질 수 있었다. 여기에 기업의 혁신까지 더해지며 신흥국들은 부의 지도를 뒤바꿔 놓는 역사상 대변혁을 이뤄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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