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위기, 대공황과 정치적 극단주의로 이어질까

머니투데이 권성희 기자 2011.11.29 1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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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위기가 두려운 이유는 단지 경제적 문제로만 그치지 않는 경우가 많아서다. 경제위기가 심화되면 사회적, 정치적 문제로 확산되며 엄청난 혼란과 불안정을 야기한다.

1930년대초 대공황은 단지 3~4년간 지속되고 끝난 것이 아니었다. 주식시장의 하락세는 3년만에 끝났지만 경제는 1930년대 내내 힘겨웠고 실업률은 좀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미국과 유럽에서 공산주의 활동이 가장 활발했던 시기도 이 때였다. 공산주의만 기승을 부린 것이 아니라 극우주의도 급부상하며 정치적 극단주의, 대중들의 단기적 욕망에만 부합하려는 추수주의(포퓰리즘)가 판을 쳤다. 독일에서는 나치즘이 등장해 전세계를 제2차 세계대전의 비극 속으로 밀어넣었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전세계를 강타하고 있는 유로존 위기의 와중에 소득불평등에 대한 불만이 고조되며 월가를 점령하라 시위가 벌어지고 유럽 각국의 정권이 잇따라 교체되는 것은 비단 지금만의 특이사항이 아니다.



세계 곳곳에서 자유무역에 대한 반대가 극심해지며 보호주의와 민족주의, 국수주의의 물결이 확산되는 것도 경제위기가 낳은 사회적 파장이다.

라도스와프 시코르스키 폴란드 외무장관은 28일(현지시간) 베를린에서 "우리는 지금 벼랑 끝에 서 있다"고 경고했다. 니콜라 사르코지 프랑스 대통령은 최근 "유로존이 붕괴한다면 유럽 역시 붕괴할 것"이라며 "유로존은 끔찍한 전쟁을 겪었던 유럽 대륙의 평화에 대한 보증"이라고 말했다.

지금의 유로존 경제위기는 대공황 때처럼 나빠질까. 지금 세대는 책에서나 배웠던 전쟁이 초래될 만큼 상황이 악화될까. 파이낸셜 타임스(FT)의 칼럼니스트인 기드온 래치먼은 28일(현지시간) 사회적으로, 정치적으로 불길한 조짐이 나타나고 있지만 문명사회가 과거 역사에서 교훈을 얻은 만큼 최악의 사태로 치닫지는 않을 것으로 예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후 60여년간 나치즘은 패배했고 스페인과 포르투갈과 그리스에서 독재 세력은 물러났으며 구 소련은 몰락했고 남아프리카 공화국의 인종 차별정책은 철폐됐다.

특히 지난 30여년간 미국과 서구의 평화와 번영은 전세계로 확산됐다. 중국의 문화혁명은 중국의 쇼핑몰과 공장에 밀려났고 마더 테레사로 대변됐던 빈곤의 나라 인도는 이제 IT 혁명의 나라가 됐다. 자본주의의 확산과 세계화로 전세계는 좀더 안전하고 좀더 동질적으로 변한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좋아지기만 하는 것처럼 보였던 세계는 2008년 리먼 브러더스 파산 이후 하루 아침에 날로 나빠지기만 하는 곳으로 바뀌었다. 세계 최대 경제권인 유럽연합(EU)의 위기는 전세계에 타격을 미칠 수밖에 없다. EU의 경제 침체는 무역을 위축시키고 글로벌 금융 시스템을 위협한다.

1930년대를 겪으며 인류가 얻은 교훈은 글로벌 경기 침체는 민주주의를 후퇴시키고 급진적인 정치 세력의 부상을 뒷받침하며 국제적인 갈등의 위험을 고조시킨다는 점이다.

1930년대의 현대판은 유럽에서 경제적 혼란과 EU의 분열을 틈타 국수주의적 정치인들이 전면에 나설 수 있도록 자리를 마련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력이 약화되고 중국의 파워가 강해지면서 글로벌 권력이 빠르게 아시아로 이동하는 가운데 중국과 미국 양쪽에서 모두 국수주의와 보호주의가 힘을 얻을 수 있는 여지가 커지고 있다.

하지만 래치먼은 3가지 이유로 전세계가 전면적 파국은 피할 것으로 예상했다. 첫째, 정치인들이 80여년 전과 똑같은 실수를 반복하지는 않을 것이란 점이다. 중국이 지속적으로 "평화로운 위상 격상"을 강조하고 있는 것은 제2차 세계대전 때 일본제국의 끔찍한 실수를 기억하기 때문일 것이다.

둘째, 제2차 세계대전 이후 강대국들 사이에 유지돼온 평화는 역사의 수레바퀴에서 운 좋은 사이클을 맞았기 때문이 아니라 그만큼 인류의 문명이 진전했음을 의미한다.

스티븐 핑커 하버드대학 교수는 최근 저서 '우리 본성의 더 좋은 천사들(The Better Angels of Our Nature)'에서 인류의 호전적 성향이 줄고 있어 "우리는 인류 역사상 가장 평화로운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고 밝혔다.

마지막으로 선진국들이 1930년대보다는 훨씬 더 높은 수준의 풍요로움에서 위기를 맞았다는 점이다. 경제적 곤경으로 저축을 줄이고 일자리와 집을 잃는 사람들은 있지만 극한의 빈곤에 처한 사람들은 거의 없다. 결과적으로 사람들이 정치적 과격주의에 경도될 위험은 그만큼 낮아졌다.

라트비아 경제는 2009년에 무려 -18%의 역성장을 기록했지만 최근 선거 결과 2개의 중도주의적 정당이 권력을 잡았다. 스페인은 실업률이 22%를 넘어섰고 청년층 실업률은 45%에 달하지만 이번달 총선에서 온건한 중도우파가 승리했다.

따라서 래치먼은 심각한 경제위기의 위험이 매우 실질적인 것은 사실이지만 인류가 전쟁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 가능성은 극히 낮다고 밝혔다.

다만 래치먼은 자신의 이같은 믿음이 운 좋게도 역사상 유례 없는 평화와 번영의 시기에 태어나 성장한 자신의 상상력 부족 때문일 수 있다며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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