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키운건 8할이 아버지…50년 가수인생 8할은 기부"

머니투데이 김희정 기자, 사진=이동훈 기자 2011.10.20 05: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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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당당한 부자]<9>가수 하춘화

"나를 키운건 8할이 아버지…50년 가수인생 8할은 기부"


지난 15일 여의도 KBS 신관 공개홀의 한 대기실.

한 신인가수가 매니저를 대동해 쭈뼛쭈뼛 들어선다. 앨범을 내고 프로 가수의 세계에 입문한 그에게 하춘화는 큰 산 같은 선배다.

앨범을 내고 인사를 하러 왔다는 까마득한 후배에게 하춘화는 겸손하게 덕담을 건넸다. "아까 들어봤는데 곡이 아주 좋더라구요. 앨범 꼭 들어볼께요. 고마워요."



데뷔 50년차 가요계 대선배로서의 권위는 없었다. 50대 중후반의 나이지만 여전히 그녀는 꽃이었다.

노래하기 위해 태어난 가수, 천만가지 재능을 지닌 가수, 추종을 불허하는 무대의 여왕, 소문난 효녀…. 그녀에게 따라붙는 수식어다.



올해로 데뷔 50년을 맞아 그녀에겐 다른 수식어가 생겼다. 40년간 200억원을 기부한 가수라는 타이틀이다.

기업도 아니고 아무리 연예인이라지만 어떻게 200억원을 기부할 수 있었을까.

"정확히 200억원이라는 건 아니에요. 일일이 다 세보진 않았지만 아마 더 될 겁니다. 하루이틀 기부한게 아니고 인기를 얻은 이후 10대 때부터 기부를 했기 때문이죠."


◇6살에 시작한 가수생활, 40년간 장수기부

"나를 키운건 8할이 아버지…50년 가수인생 8할은 기부"
중3 때 선보인 곡 '물새 한 마리'가 크게 히트를 치자, 부친은 당시 10대 소녀인 하춘화를 불러 앉히고 말했다. "존경받는 가수가 돼라", "나눔을 습관화하라"였다.



지금이야 연예인이 선망받는 직업이지만 당시만 해도 '딴따라'로 불리던 시기였다. 6살에 데뷔를 하다보니 집안 형편이 어려워 어린 딸을 돈벌이 시키는 게 아니냐는
오해도 많이 샀다.

"아버지는 상당히 깨어있는 분이셨어요. 당시 부산에서 로프사업을 하셨는데 사업이 꽤 잘 돼서 친구분께 넘기고 서울로 올라와 정치에 입문을 하셨죠. 공부만 시키고 엄하게 하실 법도 한데 제가 음악에 재능이 있는 걸 알아보셨죠."

집안에서 예능 분야에 관심을 갖고 재능을 보인 이는 네 딸들 중 그녀가 유일했다.
어린 나이에 가수활동을 하면서 시기와 질투도 많이 받았다. 특히, 연말이면 남진, 나훈아 등 당대 최고 남자가수들과 나란히 상을 받다보니 소위 '안티'도 많았다.



"어린 나이의 여자가수가 없다보니 남진 팬과 나훈아 팬이 모두 제 안티세력이었어요. 건방지다, 도도하다는 얘기는 수시로 들었죠. 지금은 다들 장성한 자녀를 둔 엄마들이니 그 때 미워해서 미안했다, 하는 분들도 있죠."

아버지는 그녀가 힘들 때나 기쁠 때 언제나 든든한 정신적 언덕이었다. 남보다 너무 일찍 주목받고 인기를 얻은 그녀가 중심을 지킬 수 있게 채찍질한 스승이기도 했다.

"아버지는 수시로 공연수익을 기부하라고 시키셨어요. 그 때만 해도 기부가 뭔지 왜 공연수익금을 내야 하는지 잘 몰랐죠. 워낙 어렸으니까요. 제가 40년간 꾸준히 기부를 한 건 이렇게 어릴 때부터 아버지가 기부를 생활화시켰기 때문이에요."



◇나를 키운 건 8할이 아버지, "존경받는 연예인 돼라"

74년 대형 개인 리사이틀 공연을 마치자 부친은 수익금을 한센인 마을에 기부토록 했다. 76년에는 영암이 고향이었던 부친이 영암의 청소년들이 학교가 없어서 이웃 도시로 '유학'을 가는 것을 안쓰러워해 고등학교 건립비를 지원토록 주문했다.

완공일에는 그녀가 직접 가서 축하공연을 했다. 2만여명이 운집했다. 그날 이후 지금까지 사람들은 하춘화가 건립비를 지원한 학교를 '하춘화 고등학교'라 부르고 있다.



하춘화는 그렇게 40여년간 꾸준히 이웃돕기 공연을 했고 한 번 할 때마다 수익전액을 그 자리에서 기부했다. 하지만 그녀는 '기부 200억원'이라는 타이틀을 부담스러워했다.

"얼마나 많이 벌고 가진게 많으면 200억원을 기부하느냐고 하는 분들도 있어요. 제가 기업가도 아니고 200억원을 한꺼번에 할 수는 없죠. 40년 전 서울에 집 한 채 값이 120만원 정도였어요, 그 때 공연수익금을 500만원씩 기부했으니 40년간 누적금액을 지금 화폐가치로 추산하면 200억원은 충분히 넘어가겠죠."

그녀는 기부의 생활화를 위해선 생각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돈이 많아서 많은 만큼 기부하는 게 아니라 수입의 일정 부분을 환원하는 것이 자동화돼야 한다는 설명이다. 쓸 돈을 안 쓰고 기부하는 게 진정한 기부라는 것.



그녀는 "지방에는 지방 나름대로 어려운 사정들이 있어요. 비가 많이 온 수해지역, 독거노인이 많은 곳 등 계획에 없다가도 공연도중 기부가 필요하겠다 싶으면 그자리에서 공연수익금을 내곤 했죠."

◇노래가 멈추지 않는한 기부도 멈추지 않는다

하춘화에게 아버지는 특별하다. 올해 구순을 맞은 아버지, 하지만 누구보다 시대변화에 빠른 분이다. 하춘화의 인터넷홈페이지를 만든 장본인이 부친이다. 91년 당시에 연예인의 개인 홈페이지가 전무했던 시절 얘기다. 구순의 부친은 하춘화의 열렬한 팬으로 지금까지 그녀의 홈페이지를 직접관리하고 있다.



그녀는 아버지로부터 배우고 습득한 게 절대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말한다. 어릴 때부터 자녀들에게 부모가 사회환원의 필요성을 교육시켜야한다는 그녀의 소신은 부친으로부터 몸소 배운 것이다.

부친을 위해 그녀는 이달에 고향인 영암에서 생신 잔치를 열기로 했다. 그녀의 노래인생 50년만에 처음으로 고향에서 여는 잔치다.

오는 11월 30일과 12월 1일에는 독거노인을 돕기 위한 자선공연을 연다. 노래는 그녀의 인생이고 노래를 할 수 있는 한 그녀의 기부 릴레이는 계속될 것 같다.



하춘화에겐 아직 이루고 싶은 꿈이 있다. 한국의 현대 대중문화의 역사를 돌아볼 수 있는 전문 대학교를 짓고싶다. 자료를 모으기도 쉽지 않고 언제 이뤄질지 모를 꿈이지만 후배들을 위해 꼭 이루고 싶단다.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은 지난 80년간 한국의 대중음악 역사와 현황이었다.

만 6살의 나이에 데뷔해 원조 아이돌인 그녀에게 지금 아이돌이 일으킨 한류 열풍에 대해 물었다. 샤이니 등 아이돌 그룹이 아시아 뿐 아니라 유럽에서도 선풍적인 반향을 일으키고 있는 것은 신기하고도 대단한 일이라는 게 그녀의 설명이다.

"우리때만 해도 생각도 못했던 일이고 신기하고 대견하죠. 음악은 국경도 이념도 넘어서는 장벽없는 언어라는걸 방증해주는 것 아닐까요. 저도 더 오래 노래할 수 있도록 노력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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