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히 부자의 사회적 책임을 실현하는 한 방법인 기부는 '세상을 바꾸는 힘'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성이 남다르다. 그들의 기부가 단순히 돈만 내는 게 아니라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지혜와 합심을 이끌어내는 힘이 있기 때문이다.
어린이들은 창원의 한 극장에서 애니메이션 영화 '마당을 나온 암탉'을 관람한 뒤 인근 뷔페로 이동해 식사를 하고 이야기를 나누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서로 다른 기관과 가정에서 온 어린이들이었지만 1년에 4차례씩 정기적으로 만나기 때문에 어색함은 없었다. 바로 하 원장이 계절마다 취약계층 어린이들을 초청해 여는 '나눔'의 행사 덕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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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 원장은 매년 시설아동이나 학대받는 아동들을 초청해 봄에는 놀이동산을 찾는 '봄소풍'을, 가을에는 운동회 행사를 치러왔고 날씨 때문에 바깥 활동이 어려운 여름·겨울에는 영화관람과 식사 등 실내에서 하는 행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1995년 첫 행사를 시작해 올해로 17년째 이어지고 있다.
첫해 수십여 명의 어린이들로 시작한 이 행사는 매년 4차례에 걸쳐 3000여 명이 손꼽아 참가를 기다리는 대규모 계절행사로 불어났다.
특히 가을운동회는 취약계층 어린이, 사회복지단체, 봉사자 등 1000명 이상이 참가하는 지역 최대 나눔행사로 자리 잡았다. 17년 동안 여러 행사를 거쳐 간 어린이수 또한 3만 명이 훌쩍 넘었다.
한 원장이 주도하는 나눔 행사는 '일회성'이 아니라는 점에서 남다른 의미가 있다. 1년에 4차례의 공식적인 행사 이외에도 교육봉사, 의료봉사 등을 수시로 진행해 어린이들과 지속적으로 소통하고 꿈을 이룰 수 있도록 동기를 부여해 준다.
특히 국가의 지원을 받지 못하는 차상위계층 어린이들이 학업을 원활히 이어갈 수 있도록 학교 담임교사의 추천을 받아 매월 70여명의 학생들에게 급식비를 지원하고 별도로 정기 장학금 후원도 진행하는 것이 인상적이다. 하 원장은 장학금 지원 등 사회적 기부로 매년 5억 원 가량을 내놓고 있다. 지금까지 사회에 환원한 각종 기부금 및 지원금만도 50억 원을 넘어선다.
10년 전 하 원장의 나눔 행사에 처음 참여해 '아픈 사람을 돕고 싶다'는 꿈을 밝힌 한 소녀가 어려운 환경 속에서도 대학에 진학, 간호사가 돼 하 원장의 병원에서 꿈을 실현하고 있는 것도 '하충식표 나눔'의 긍정적 힘을 나타낸다.
하 원장은 "도움의 손길을 필요로 하는 많은 분들이 있지만 특히 어린이들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우리 사회를 더 좋은 사회로 만들 더 많은 가능성을 품고 있기 때문"이라며 "하지만 어린이들의 경우 일회성, 이벤트성 기부나 나눔은 의도치 않게 상처를 줄 수 도 있다. 규모가 크지 않더라도 꾸준한 관심과 사람이 중요다"고 자신의 나눔 철학을 소개했다.
하 원장은 1995년 1월 병원 개원 직후 다양한 나눔활동을 시작하려 했지만 개원 초기 경영환경 등이 여의치 않자 새로운 형태의 나눔활동을 구상했다. 바로 매일 아침 7시30분부터 40분 간 병원 인근 청소활동 등 자원봉사를 시작한 것.
처음에는 하 원장과 일부 남자 직원들만 참여했지만 횟수를 거듭하면서 인원이 늘어 1997년 9월에는 '나라사랑회'라는 정식 봉사단체도 결성했다.
하 원장은 "주어진 여건 속에서 내가 나눌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를 고민해보니 '건강한 신체'였다"며 "지난 17여년간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하루도 거르지 않고 봉사활동을 진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하충식 창원한마음병원장(오른쪽 첫번째)이 지난해 7월15일 청와대에서 '국민추천포상' 시상식에서 이명박 대통령으로부터 국민포장을 수상한 후 기념촬영하고 있다.
하 원장은 "국민포장의 경우 국민들이 직접 봉사와 기부 선행을 해 온 인물을 뽑는다는 점에서 의미가 더 깊었다"고 전했다.
하 원장이 나눔의 행복을 알게 된 계기는 무엇일까. 그는 "나눔의 DNA를 어머니로부터 물려받았다"고 고백했다.
양반고을로 유명한 경남 함양 출신인 하 원장. 어린 시절 넉넉하지 않은 살림이었지만 그의 어머니는 춘궁기에 밥을 얻으러 온 이웃을 빈 그릇으로 보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 덕에 하 원장이 밥을 굶은 적도 있다.
하 원장은 "어릴 때만 해도 모두가 가난해서 춘궁기에는 거지가 아니더라도 밥을 얻으러 다녔다"며 "어머니가 밥을 나눠주시며 한 말씀이 '야야(얘야), 사람 위에 사람 없고 사람 밑에 사람 없다'였다. 그게 지금도 인생의 좌우명"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