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996년 절삭공구 제조업체 와이지-원 (5,720원 ▲20 +0.35%)의 송호근 대표(59)는 한 경제단체 행사에 갔다가 나오던 길이었다. 누군가 따라 나와 송 대표를 불렀다. 홍경석 당시 수출입은행(수은) 인천사무소장 이었다. 홍 소장은 "수출실적으로 대출받을 수 있는 상품이 있는데 왜 안 쓰느냐"고 물었다. 그때만 해도 중소기업은 시중은행에서 담보 없이 대출받기가 어려웠다.
송 대표는 수은의 중소기업 지원 프로그램을 알게 됐다. 이미 40개국에 수출하고 있었지만 중소기업이라는 이유로 자금마련에 어려움을 겪던 처지였다. 와이지-원은 수은으로부터 30억원을 받아 수출물량을 맞췄다. 매출 237억원의 한 중소기업과 수출입은행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됐다.
회사는 독일 업체와 맺은 660만 달러의 공급계약을 지키기 위해 대출이 급했다. 수은은 담보 없이 60억원을 줬다. 송 대표는 6개월 만에 수출대금을 받아 전액 다 갚았다.
2009년 매출은 전년대비 34% 곤두박질쳤다. 생산량이 줄어들면서 고정비 부담이 늘었다. 결국 1986년 창사 이래 23년 만에 146억원의 순손실이 발생했다.
그러나 신뢰로 맺은 인연은 변하지 않았다. 수은은 기존 대출을 문제없이 연장해줬다. 나아가 2009년10월 와이지-원을 '히든챔피언 육성대상기업'으로 선정했다. 절삭공구 세계 1위 기업으로 도약하기 위해 필요한 각종 금융·비금융 서비스를 종합적으로 지원하겠다는 의지를 천명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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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이지-원은 수은의 전폭적 지원에 힘입어 보란 듯이 2010년 흑자전환에 성공했다. 수은 역시 와이지-원의 성장으로 주요 사업인 히든챔피언 육성사업이 더욱 탄력을 받게 됐다고 평가한다.
↑ 인천 부평공장 내에서 절삭공구 제품을 살펴보고 있는 송호근 와이지-원 대표.
송 대표는 서울대 공대를 나와 대기업 화이트칼라 자리를 마다하고 제조업 현장으로 뛰어들었다. 얼마 후 다니던 회사를 그만두고 고부가가치인 절삭공구 제조공장을 창업했다. 기술 없이 절대 성공할 수 없다는 신념으로 밤낮없이 경험을 축적했다.
현재 와이지-원은 앤드밀 세계시장점유율 1위다. 탭은 4위, 드릴은 6위다. 앤드밀이란 금형을 정밀하게 깎을 때 쓴다. 드릴은 구멍을 뚫을 때, 탭은 구멍에 나사선을 만들어 볼트가 체결될 수 있도록 하는 공구다. 즉 자동차, 휴대폰 등 각종 주력산업의 제품들이 모두 이런 절삭공구를 거쳐 탄생된다. 쏘나타, 아이폰의 모체가 되는 정밀금형을 만드는데도 와이지-원의 손길이 거친다.
송 대표는 "엔드밀의 경우 1분에 3만번을 회전하는데 1000분의 5mm 오차까지 잡아낼 정도로 정밀하다"고 소개했다. 이 같은 높은 기술력을 바탕으로 엔드밀 글로벌 시장점유율 12%를 기록 중이다. 제조사만 1000개가 넘는 가운데 거둔 성적이다. 일본의 히타치, 미쓰비시, 교세라 같은 쟁쟁한 대기업들도 압도했다.
송 대표는 "제조업의 가장 기본을 담당하고 있다"며 "우리 제품이 없으면 전국의 공장마다 비싼 일본산 공구를 들여다 써야한다"고 말했다.
국내는 물론 세계시장에서 더 인정받는다. 매출의 70~80%를 수출한다. 독일, 미국, 캐나다, 일본, 중국, 인도에 해외공장만 9개가 있다.
목표는 더 높다. 송 대표는 "매출 2014년 1조원(해외공장 등 포함), 2020년 2조원을 달성할 것"이라고 밝혔다. 올해 매출은 지난해보다 38% 증가한 2500억원에 달할 전망이다.
◇"비올 때 우산 안 뺏는 깨끗한 수은"=송 대표는 수은의 지원이 다른 금융기관과 다른 점에 대해 "전략 자체가 다르다"고 평가했다. 첫 마디가 "수은은 꺾기가 없다"고 표현했다. 사실 일반 시중은행이 아니니까 꺾기(구속성 예금)가 없는 게 당연하다. 그만큼 국책은행으로서 금융사의 이익이 아닌 산업발전을 먼저 염두에 두고 지원한다는 의미다.
송 대표는 "굉장히 높은 수준의 금융을 한다"며 "사업의 타당성을 면밀히 살펴 신용으로 줄건 주고 어느 정도 이상의 여신을 못한다는 제한도 미리 두지 않는다"고 말했다. 투명한 기준과 평가로 탄력적 지원체계를 갖추고 있다는 평가다. 현재 수은은 와이지-원과 그 관계사 앞으로만 약 380억원의 여신을 지원 중이다.
물론 다른 금융사들도 이제는 중견 중소기업을 보는 태도가 많이 달라졌다. 송 대표는 "이제는 은행들이 기업에 먼저 와서 돈 쓰라고 한다"며 "담보 없이 신용으로 줄 수 있다는 것 자체가 큰 발전"이라고 말했다.
다만 아쉬움도 있다. 글로벌 금융위기를 겪을 때 뼈저리게 느꼈다. "외국자본이 들어간 은행일수록 비올 때 우산을 뺏더라"는 경험이다.
송 대표는 "본질적 리스크가 아니라 일시적 어려움에 빠진 기업이라면 은행들이 과감하게 도와주는 결단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