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현칼럼]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

머니투데이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 2011.09.07 06: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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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서재를 정리하다 지난해 돌아가신 부친이 생전 필자에게 쓰신 메모지 하나를 발견하게 되었다. 15년 전 필자가 미국에서 교수로 임용된 후 몇 가지 명심해야 할 것을 정리한 내용이었다. "첫째, 교수로서 품위를 잃지 말 것. 겸손하나 비굴하지 말 것. 둘째…"로 시작되는 작은 메모였다. 사회에 첫발을 내딛는 미욱한 아들에 대한 염려에서 긴 비행시간 동안 정리하고 또 정리하셨을 부친을 생각하니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하니 어디서 이와 비슷한 장면이 있었던 것 같다. 바로 안톤 슈낙의 수필,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에 나오는 '숱한 세월이 흐른 후에 문득 발견된 돌아가신 아버지의 편지'라는 구절이었다. 인터넷을 뒤져 그 수필을 다시 읽어 보았다. 이 산문은 80년대 초반까지 교과서에 실렸던 관계로 당년 40대 후반 이전 세대에게는 매우 친숙한 글이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당시에도 고등학교 교육은 대학입시가 최우선이 되던 시절이라 국어교육 역시 명문이 주는 의미와 음조를 음미하는 것보다는 정작 글을 쓴 작가도 모르는 의도를 찾는 강요된 해독과 기계적인 문법분해가 주를 이루었다.



살아있는 글을 감상하기보다 죽은 글을 부검했던 것이다.

글이란 아는 만큼 보이고 겪은 만큼 느낀다고 했던가? 동일한 글이지만 중년이 된 지금 읽어보니 그 슬픔의 편린이 주는 형광은 눈시울을 적시고 잔광은 가슴을 적신다. 지나간 삶의 화첩을 다시 들여다보니 안톤 슈낙이 열거한 많은 '슬프게 하는 것들'이 여기저기서 묻어져 나온다.



사회적으로도 많은 '슬프게 하는 것들'이 여전히 우리 옆에 있다. '동물원의 우리 안에 갇혀 초조하게 서성이는 한 마리 범의 모습'에서 지금의 88만원 세대를 보게 된다. '언제 보아도 철책을 왔다갔다하는 그 동물의 번쩍이는 눈, 무서운 분노, 괴로움에 찬 포효, 앞발에 서린 끝없는 절망감, 미친 듯한 순환…' 무한경쟁이란 '철책'에 갇히고 희망이 담보 잡힌 세대. 시간의 조표에 높은 음자리는 없고 악보에 덧칠된 무수한 도돌이표. 그러다 문득 '휴가의 마지막 날 사무실에서 때묻은 서류를 뒤적이는' 자신의 모습에 소스라치는 '젊은 날의 초상'.

중년층의 모습은 어떠한가? 옛 친구인 '거만한 인간'은 '존경받을 만한 고관대작, 혹은 부유한 기업인이 되어 우리를 보고 손을 내밀기는 하되 이미 알아보려 하지 않는 듯한 태도'를 취하거나 '자동차에 앉아 있는 출세한 부녀자의 좁은 어깨'로 다가선다. 그러나 그 '잘나가던 인간'은 어느새 '세 번째 줄에서 떨어진 어릿광대'로 전락하고 '사냥꾼의 총부리 앞에 죽어가는 한 마리 사슴의 눈초리'를 보낸다. 그리고 남은 '추수가 지난 후의 텅빈 논과 밭'. 그곳에는 '이미 아무도 당신을 알아보는 이'도 없고 '가난한 노파의 눈물'만 에필로그로 투영된다.

요즘 세간의 화제가 되는 두 가지 사안이 필자를 슬프게 한다. 현 서울시 교육감의 공직선거법 위반 혐의와 성희롱 파문을 일으킨 국회의원에 대한 제명안 부결이 그것이다. 사안은 다르지만 둘 다 우리 사회, 특히 지도층의 의식수준이 어느 정도인지 보여주는 극명한 사례라고 할 수 있다. 차라리 분노의 카타르시스면 좋겠는데 슬픔의 페이소스만 남는다.


지난 5월 저축은행 사태를 보면서 '쿼바디스 노모스'란 제목 하에 우리 사회에 팽배한 '노모스의 부재'를 개탄한 적이 있다.

법이란 사회의 질서와 공공의 안녕을 유지하기 위한 최소, 최후의 장치다. 법에 앞서 사회 구성원 개개인이 안고 있는 '노모스'야말로 그 사회의 '건강'을 결정하는 결정적 요소다. 유죄냐 무죄냐에 앞서, 또 '누가 이사람에게 돌을 던질 것인지'를 묻기에 앞서 스스로에게 '한 점의 부끄러움'도 없는지 자문하는 세상, 그러한 세상이 되어야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도 줄일 수 있지 않을까? 그렇지 않아도 '따사로운 햇빛이 떨어져 슬픈 초가을'에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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