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산하지 말고 부딪치세요”

머니위크 지영호 기자 2011.10.25 10: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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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억대연봉’ 골든클럽에게 한수 배우기/금나라 헤어디자이너

샐러리맨의 꿈인 억대연봉을 비교적 젊은 나이에 이룬 '프로'들이 있다. 이들의 공통점은 '열정'이다. 주변 친구들과 어울려 시간을 보내는 대신 자기의 목표를 위해 시간을 투자했다.

물론 실패도 겪었다. 하지만 이들은 한결같이 실패가 지금 이 자리에 설 수 있는 자양분이 됐다고 털어놓는다.



<머니위크>는 창간4주년을 맞아 남들보다 일찍 억대 연봉의 대열에 들어선 '골든클럽' 멤버를 만나봤다. 이들은 생각보다 가까운 우리의 이웃이었다.

인터뷰를 아침에 잡는 경우는 좀처럼 드물다. 현장을 보여줘야 하는 환경미화원이나 새벽시장의 상인이 아니라면 굳이 아침 인터뷰를 할 필요가 없다. 20대 여성이라면 더더욱 그렇다. 아침 인터뷰를 요청하면 퇴짜 맞기 일쑤다. 얼굴이 부어 보인다는 이유가 제일 크다.



그런데 이 여성은 오히려 아침 인터뷰를 고집했다. 그것도 '아름다움'을 서비스하는 여성이 말이다. 주인공은 준오헤어 천호점의 금나라 헤어디자이너(27·본명 임은희). 그녀가 아침 인터뷰를 고집한 이유는 인터뷰로 인해 고객들이 방해받을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녀는 매달 1000만원 이상을 가져가는 고소득자다. 사규에 따라 인센티브제로 수입이 발생하기 때문에 규칙적이지는 않지만 연봉으로 치면 1억~1억5000만원가량 된다. 검정고시 출신의 20대 여성이 억대연봉자의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던 배경은 뭘까.




◆번데기를 싫어하던 소녀

“넉넉한 편은 아니었어요. 부모님이 경제적인 여유가 없으셔서 줄곧 할머니 손에서 컸어요.”



부모님의 이혼과 아버지의 사업실패는 그녀를 어려서부터 강인한 여성으로 만들었다. 그녀는 중학교 1학년 때부터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신문·우유배달은 기본이고 레스토랑 서빙, 주유소 주유원, 편의점 점원, 극장 안내, 마트 세일즈, 알밤까기 등 생활비를 댈 수 있는 일이라면 닥치는 대로 했다.

“번데기공장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는데, 공장에서 번데기를 자주 챙겨줬어요. 할머니는 반찬값 안 든다고 좋아하셨지만 전 매일같이 도시락으로 번데기반찬을 싸가야 했지요. 창피했던 기억때문인지 지금도 번데기를 잘 안 먹어요.”

그녀는 대구의 한 실업계 고등학교를 다니다가 1학년을 마치고 학교를 그만뒀다. 중학교 때부터 장학금을 놓친 적이 없었을 정도로 매사에 열심인 학생이었지만 생활고가 발목을 잡은 것.



학교를 자퇴하니 학업의 아쉬움이 남았다. 그녀는 1년 뒤 대입검정고시를 통과해 고등학교 졸업 자격을 얻었다. 하지만 대학 입학은 언감생심이었다. 결국 그녀는 18살 때 지인의 추천으로 미용을 시작했다.



◆행복을 만든다는 말에 디자이너 꿈 키워



동네 미용실에서 처음 가위를 잡았다. 제법 감각이 있어서인지 금방 커트 손님을 받았다. 하지만 경력도 실력도 부족한 자신이 벌써부터 커트를 한다는 것이 쉽게 용납되지 않았다.

“우연히 한 헤어디자이너를 만나게 됐는데, 그분이 ‘헤어디자이너는 행복을 만들어주는 사람’이라는 말씀을 하시더군요. 그 말에서 자부심이 느껴졌어요. 공감도 했고요. 체계적인 공부를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죠.”

상경을 결심했지만 집안의, 특히 아버지의 반대가 심했다. 서울에서 부동산 사기를 당했던 아버지에게 서울은 '무서운 곳'이었다.



2년간의 미용일을 계속 하면서 그녀는 1300만원을 모았다. 그리고 20살 때 A보건대 임상병리학과에 입학했다. 가운을 입은 모습을 아버지가 원해서였다. 그러나 시간이 아까웠다. 결국 1학기 만에 또 다시 학교를 그만뒀다. 대신 이천의 하이닉스공장에 고졸사원으로 입사했다.

이곳에서 8개월을 열심히 일해 재산을 2000만원으로 늘렸다. 그리고 몰래 상경했다. 미용의 꿈을 꾸고 있던 그녀는 22살이 되던 2005년 준오헤어아카데미에 문을 두드렸다.

◆실패는 없다 경험만 남을 뿐



2년반 동안 하루 3~4시간 이상 자본 적이 없었다. 매일같이 연습에만 몰두했다. 하이닉스공장에 다니면서 월 200만원과 그에 못지않은 보너스를 받아왔던 그녀에게 월 70만원의 박봉은 연습생이 겪어야 할 시련의 일부였지만 후회스럽진 않았다.

“돈을 많이 벌려고 했다면 미용을 하지 않았을 거예요. 좋아하는 일을 즐기면서 돈까지 벌 수 있다는 것으로도 행복했어요. 헤어디자이너는 아름다움을 만들어주고 고객으로부터 감동을 전하는 일이잖아요. 출근할 때 거울을 보며 ‘고객에게 행복을 나눠드려야지’라고 다짐하곤 합니다.”

스텝 생활 2년6개월 만에 디자이너가 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인 승급 헤어쇼에서 그녀는 자연주의를 재해석한 모던 내추럴 스타일을 출품했다. 그 결과 80여명의 동기 중 4명에게 공동 수여되는 최고수상작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디자이너가 되고 나서도 채찍질은 계속됐고 노력의 결과는 곧바로 나타났다. 신입 3개월 만에 월 매출 1000만원을 올렸다. 보통 디자이너로 1년 이상 활동해야 거둘 수 있는 매출이었다. 현재 그녀는 월 5000만원의 매출을 책임지는 대표 디자이너가 됐다.

대학 졸업장도 없이 20대에 억대연봉대열에 들어선 그녀는 88만원 세대에게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까? 넌지시 취업경쟁으로 밤을 새우고 있는 또래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는지 묻자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머리로 계산하지 말고 일단 부딪쳐보세요. 현실을 두려워하지 말고 조건이나 환경 같은 것도 따지지 말고 오로지 자신의 가능성만 믿으세요. 실패는 없습니다. 경험만 남을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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