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경제대국의 꿈, '유라시아 경제연합' 시동

머니투데이 김성휘 기자 2011.08.22 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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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인사이트]소련해체 20년, 경제 자신감 바탕 EU식 통합 추진

유라시아 대륙의 옛 소련 구성국들의 경제를 통합, 러시아가 주도하는 새로운 국가공동체를 세우겠다는 움직임이 마침내 수면 위로 드러났다. 현재 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 3국이 체결한 관세동맹에 우크라이나 등 옛 소련의 형제국가를 동참시켜 유럽연합(EU) 수준으로 경제통합을 격상시킨다는 구상이다.

러시아 경제대국의 꿈, '유라시아 경제연합' 시동


러시아 대통령을 연임(2000~2008)하며 21세기 차르(황제)로 통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총리(사진)와 카자흐스탄, 벨라루스의 총리들은 지난 15일(현지시간) 모스크바에서 관세동맹국 총리회담을 열고 2013년까지 ‘유라시아 경제연합’을 창설하기로 합의했다.



세 총리는 이날 회담에서 우선 내년 1월까지 ‘공동경제구역’(CES)을 조성하기로 합의했다. CES는 경제통합 수준에서 관세동맹보다 한 단계 진전된 형태이다. 예정대로 공동경제구역을 건설할 경우 세 나라는 소련시절 인구의 60%에 해당하는 1억6500만명을 거느린 단일 시장으로 발돋움한다.

이어 2013년엔 경제연합을 출범하기로 했다. 이 때 3개국 외에 잠재적 회원국으로 여겨지는 우크라이나,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이 합류하면 총 6개국에 인구 2억2300만명을 포괄하게 된다.



소련 구성국들 사이에 높이 올라갔던 국경 장벽과 경제활동의 걸림돌이 상당 부분 허물어지고 자본과 상품, 서비스의 이동이 자유로워지는 것이다.

푸틴 총리는 “이번 경제연합 건설은 지정학적으로 매우 중요한 의미”라며 “과거 소련 시절의 자연스런 경제 및 무역 관계를 회복시키는 진정한 첫 걸음이 될 것”이라고 강조했다. 이날 총리회담에선 EU의 유로와 같은 역내 공동통화 도입까지 테이블에 올랐다.

▲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의 관세동맹ⓒ리아 노보스티 통신(rian.ru)▲러시아 카자흐스탄 벨라루스의 관세동맹ⓒ리아 노보스티 통신(rian.ru)
러시아 자신감 과시= 이번 유라시아 경제연합 선언은 무엇보다 그 시기가 의미심장하다. 올해가 단지 소련해체 20주년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국제무대에서 러시아의 경쟁국가들이 저마다의 경제사회적 문제에 발목이 잡힌 것이 러시아를 더욱 주목하게 한다.


전세계 지역통합의 모범으로 통하던 EU는 태생적 약점 탓에 해체론까지 제기될 만큼 어려움에 빠져 있다. 독일, 프랑스 등은 국내문제와 EU 현안 해결에 골몰하고 있다. 세계 최강대국 미국, 아시아의 경제거인 일본조차 국가 신용등급이 강등되거나 심각한 저성장에 빠지는 위기를 겪고 있다.

이에 비해 러시아는 소련 해체 후의 혼란기를 딛고 꾸준히 체력을 비축해 왔다. 1998년 채무불이행(모라토리엄)을 선언할 정도로 추락했던 러시아 경제는 글로벌 금융위기도 이내 극복할 만큼 안정됐다. 2009년 실질 국내총생산(GDP)이 전년비 7.8% 역성장했지만 2010년 4% 플러스 성장으로 돌아섰다.



올해 1~2분기는 각각 2.2%, 1.1% 성장했다. 독일의 2분기 성장률이 불과 0.1%, 프랑스는 제로 성장에 그친 것과 확연히 대조된다.

고질적인 약점으로 거론되던 투자환경 또한 드미트리 메드베데프 대통령 취임 후 꾸준히 개선됐다. 올 상반기 외국인직접투자(FDI)는 전년비 44% 늘어나 270억달러를 넘겼다.

이처럼 러시아의 경제력이 개선되자 주변국에 대한 러시아의 입김도 강해지고 있다. 게다가 러시아는 역내 최대 에너지 공급국이다. 푸틴이 소련 해체 20주년에 유라시아 경제연합을 과감히 선언한 것은 이러한 자신감의 표현이다.



그렇다면 유라시아 경제연합 선언의 이면에 있는 러시아의 노림수는 무엇일까.

러시아 경제대국의 꿈, '유라시아 경제연합' 시동
잠든 인프라 깨워 경제영토 확장= 유라시아 경제연합의 최대 잠재력은 소련 시절 하나의 시스템으로 운영되다 지금은 제각각인 경제 인프라를 재결합할 수 있다는 점이다.

소련의 각종 산업기반은 여러 공화국에 분산 건설됐다. 예컨대 러시아 볼가강 유역에 자동차 공장을, 쿠즈네츠크에 광산기지를 세웠고 각 거점은 해당지역뿐 아니라 소련 전역에 제품을 공급했다.



그러나 소련 해체 후 일제히 독립한 공화국들은 큰 불편을 겪는다. 필요한 제품을 만들어주던 이웃 마을이 하루 아침에 남의 나라가 됐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비용과 절차, 수입관세 등 각종 부담이 늘었고 이 같은 불편은 소련 해체 후 혼란에 휩싸인 지역경제를 더욱 어렵게 하는 걸림돌로 작용했다.

고재남 외교안보연구원 교수(유럽아프리카 연구부장)는 소련 경제의 특징이 회원국간 물류교통의 연계 등 제도화된 상호의존성이었다고 지적했다. 고 교수는 “독립 이후 이 연계장치의 가동률은 분야별로 50~80% 수준에 그쳤다”며 “이것을 복원하면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다는 것이 경제연합 추진의 한 배경”이라고 분석했다.

중국化 차단, 강대국 러시아 부활= 경제연합의 동쪽을 보면 중국 영향력 확대를 견제하겠다는 또다른 목적이 확연히 드러난다.



러시아는 시베리아 남부와 극동지역에 중국인이 급속도로 유입, 현지 상권을 장악하는 이른바 인구와 경제의 삼투압 현상에 골머리를 앓고 있다. 카자흐스탄은 경제성장에 따라 중국의 도움이 필요하고 실제로 중국과 경협도 확대일로이지만 중국이 새로운 패권자로 등장하는 것은 내키지 않는 일이다.

현재 관세동맹 밖이지만 유라시아 경제연합에 관심을 보이는 키르기스스탄과 타지키스탄은 각각 중국과 국경을 마주해 중국의 서북 경제권과 급속히 가까워지고 있다. 특히 키르기스스탄은 마치 수도꼭지처럼 중국 상품을 중앙아시아에 유통시키는 경로가 되고 있다.

이들이 경제연합을 구축해 중국의 침투를 막으면 러시아가 영향력을 복원할 여지가 늘어나는 것이다.



서쪽을 봐도 경제연합의 효용은 확인된다. 구속력 있는 경제연합으로 벨라루스와 우크라이나를 묶어둠으로써 이들이 EU와 더욱 가까워지는 것을 막을 수 있다.

러시아는 내친김에 EU와 대등한 자유무역협정(FTA)을 체결, 초대형 경제블록을 이루겠다는 야심도 품고 있다. 러시아의 국제경제체제 편입에 속도를 내고 경제영토를 유럽까지 확장한다는 것이다.

이미 3국 관세동맹은 EU식 법체계를 원용하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FT)는 이에 대해 법규를 새로 제정하는 수고를 덜면서 EU와의 경제관계 확대를 대비한 포석이라고 전했다.



결국 유라시아 경제연합이 예정대로 착착 진행되면 러시아로선 지역 내 영향력 확대와 국제적 위상 강화, 경제이익 창출 등 다양한 핵심 국익을 확보하게 된다.

고재남 교수는 유라시아 경제연합이 "옛 소련 구성국 사이에 경제적 이해관계가 부합하는데다 중국 경제력의 침투도 견제할 수 있을 것"이라며 "무엇보다 경제 통합을 바탕으로 정치외교적 통합을 확대발전시키려는 전략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EU 반면교사 등 숙제 첩첩= 전문가들은 유라시아 경제연합이 비교적 실질적인 기능을 하는 의미있는 행위자로 등장하리라고 전망했다. 러시아의 경제적 자신감과 저력이 충분한 데다 그동안 러시아의 지역 재통합 시도를 견제해 오던 미국과 유럽이 집안단속에 골몰하고 있는 국제적 환경도 그 이유다.



니콜라이 페트로프 모스크바 카네기센터 연구원은 “서유럽 국가들이 재정문제에 허덕이는 동안 푸틴 총리는 교묘하게 이득을 얻고 있다”며 “지금이 경제연합 건설 계획을 실현할 최적의 시기”라고 말했다.

러시아 경제대국의 꿈, '유라시아 경제연합' 시동
그러나 유라시아 경제연합이 성공하자면 넘어야 할 산도 적지 않다. 우선 우크라이나의 동참이 필수적이다.

우크라이나는 유럽에서 국토면적은 2위, 인구는 5위에 이르고 식량 생산, 자원보유, 기술력 면에서 지역 내 러시아 다음가는 경제력을 갖췄다. 푸틴조차 우크라이나가 들어와야 경제연합이 비로소 완성된다는 입장이다.



그러나 우크라이나는 소련 시절부터 끊임없이 모스크바의 간섭을 거부해온 전통이 있다. 러시아로선 우크라이나에 보다 충분한 당근을 제공해야 한다.

EU와 같은 시행착오를 반복해선 안된다는 과제도 있다. 유라시아 경제연합 역시 러시아와 기타 회원국간 경제 격차가 크므로 성장동력이 약해질 경우 지금의 EU와 비슷한 문제를 겪을 수 있다.

푸틴은 지난해 11월 독일에서 “포르투갈 수도 리스본에서 러시아 극동 도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아우르는 경제공동체를 만들어야 한다”고 말한 바 있다. 푸틴의 말처럼 대서양에서 태평양까지 사상최대 경제블록이 러시아의 주도로 탄생한다면 우리나라 경제에도 적잖은 변수가 될 전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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