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으로]스티브 잡스가 한국에 없는 이유

머니투데이 안홍철 코트라 인베스트코리아 단장 2011.06.08 07: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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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속으로]스티브 잡스가 한국에 없는 이유


모든 사람은 심지어 개, 고양이 같은 동물, 인형까지도 각자 이름을 갖고 있다. 태어나면서 붙여진 자신만의 고유한 아이덴티티인 이름은 죽을 때까지, 아니 죽고 나서도 쓰인다.

가령 같은 이름을 가진 사람이 이 세상에 스무 명가량 있다고 하더라도 나와 같은 사람은 없다. 이름은 나를 나타내는 고유한 식별기호인 것이다. '김철수' '김영희' '김재석' '김태희'….



이처럼 자신만의 고유한 아이덴티티를 나타내는 이름은 어릴 적엔 그런대로 사용이 되지만 어른이 되고 직장을 다닐 때쯤이면 그 사용 빈도가 줄고 만다. '김 과장!' '이 부장' '최 사장' 등의 직위에 함몰되거나 '김씨' '이씨' '아저씨' '총각' '이모' '언니' 등의 애매모호한 그룹으로 매몰돼 버린다.

어릴 적에도 또래그룹에 속하지 않으면 '나'라는 존재로서 이름은 집 밖에선 잘 사용되지 않는다. 그저 같은 학교 친구, 같은 반 친구, 같은 동네 친구일 뿐 이름은 잘 모르는 채 지낸다.



그러나 미국 등 서구 문화권에서는 어릴 때나 어른이 되어 직장을 다녀도, 사장이 되고 유명인사가 되어도, 심지어 대통령이 되어도 이름은 계속 사용된다. 스티브 잡스는 '잡스 사장'이 아니라 '스티브 잡스'로, 마이클 조던은 '조던 선수'가 아니라 '마이클 조던'으로 인식된다. 버락 오바마 대통령도 누구나 그 이름을 부르고, '대통령님'과 같은 존칭을 사용하는 예외적인 의전행사 같은 경우에만 그 이름을 부르는 대신 '미스터 프레지던트'라 부른다.

미국 학생들의 경우 비록 한 학급의 학생 수가 통상 20~30명 정도로 적기는 하지만 모두 다른 학년의 학생 이름까지도 잘 알고 있다. 사람과 이름은 늘 같이 다니는 것이다. "한국 사람 가운데 가장 머리 좋은 사람이 미국 사람 가운데 가장 머리 나쁜 사람보다 사람 이름을 잘 외우지 못할 것"이라는 말이 설득력을 가질 정도다.

지구 위에 오직 하나뿐인 '나'라는 지울 수 없고 바꿀 수 없는 아이덴티티 내지 개성인 '나만의 이름'이 사회적 지위나 그룹 이름 속에 매몰돼 버리는 우리 문화는 나만이 가진 고유한 이름에서 배어나오는 다른 사람과 '다른 나'라는 개성을 사라지게 하고 '모난 돌이 정 맞는다'는 말처럼 '남과 같은 나'(Me Too!)가 되고자 애쓰도록 한다.


또한 이름에 둔감한 한국문화와 이름에 민감한 미국 등 서구문화의 차이는 길을 잃고 방향을 물을 때도 잘 드러난다.

외국에서 길을 물으면 남녀노소할 것 없이 정확한 거리이름과 함께 좌회전, 우회전, 직진 등 방향을 잘 가리켜준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방향을 아는 사람도 드물지만 알더라도 "여기서 쭈욱 가면 담뱃가게가 나오는 데 거기서 왼쪽으로 10m쯤 가다보면 약국이 나오고, 거기서 오른쪽으로 100m쯤 가면 왼편에 마을회관이 나타나는데 그 부근에 가서 한번 물어보세요" 하는 식이다. 사람이든, 길이든 그 이름에 대해 관심이 없는 문화의 다른 단면이다.

요즘 세대는 남과 다른 '나'이기를 주저하기는커녕 남과 다른 나가 되기 위해 애쓰는 모습을 종종 볼 수 있기는 하나 아직도 여전한 '붕어빵 문화'는 학교 수업시간이나 토론마당 참가자들로 하여금 질문을 하는 대신에 침묵을 지키도록 한다.

미국에서 공부하던 시절, 끊임없이 학생들에게 질문을 던지고, 바보 같은 대답을 한 학생에 대해 우리 같으면 "틀렸고. 누구 정답 아는 사람?"이라고 하거나 틀린 답을 말한 걸 단박에 알 수 있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돌리는 교수님이 아니라 "왜 그렇게 생각하느냐"고 묻곤 "음, 재미있는 발상이네. 다른 의견이 있는 사람"하며 절대 무안을 주지 않는 양방향 통행의 수업은 일방 통행식 강의에 익숙한 필자에게는 커다란 문화적 충격이었다.

나와 다른 남, 남과 다른 나. 집단 속의 일부가 아닌 개체의 존재를 인정하는 문화. 사회적 지위로 대변되는 이름 (김 과장)이 아니라 개인으로서 이름 (김 철수)이 불리는 날 우리도 스티브 잡스의 탄생을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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