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전봇대 '준법지원인'

머니투데이 김준형 증권부장 2011.04.12 15: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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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준형의 돈으로 본 세상]

"최고의 □□□는 죽은 □□□"
흔히 듣는 미국식 농담이다. 정치인 공무원 검사 판사 기자에서 상사(윗사람)에 이르기까지 욕 많이 먹는 부류들이 들어가는 시리즈가 무한정 가능하지만, 딱 들어 맞는 원조 정답은 '변호사'다. 특히 상장기업 경영진이라면 요즘 이 말이 팍팍 가슴에 와 닿을 것이다.

일본 대지진의 쓰나미가 몰려오던 지난달 11일 서울 여의도 국회에서는 상법 개정안이 조용히 본회의를 통과됐다. 당일 실시간 뉴스나 다음날 신문은 온통 쓰나미 관련기사로 도배가 됐다. 통과된 법률에 무슨 내용이 있는지는 잘 알지도 못했다.



뒤늦게야 상장기업들은 그날 통과된 상법에 '준법지원인제'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변호사 취업 보장'제도가 끼어 있었다는 걸 알게 됐다.
요약하자면 일정규모 이상 상장사들이 변호사나 법학교수를 의무적으로 고용해 '법률적 지원'을 받도록 한다는 것이다. 내년 4월부터는 전 상장기업들이 변호사님을 억지로 모시고 살게 될 판이다. 기업들이 하나같이 "대명 천지에 뭐 이런 일이 다 있나"라고 기막혀 하는데도 오늘(12일) 국무회의를 통과했다.

이명박 대통령은 국무회의에서 "중소기업에 불필요한 부담이 없도록 해야 한다"며 시행령으로 보완할 방침을 밝혔다. 하지만, 법이라는게 한번 만들기가 힘들지, 만들어진 다음에 시행령에서 이해당사자들의 입김을 반영시키는 건 훨씬 쉽다.
실제로 막강한 압력단체인 변협은 나중에 모든 상장사로 확대 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갖고 있다.



올해 당선된 신영무 변협회장은 며칠전 기자회견에서 "준법지원인 제도는 대기업보다 코스닥 상장기업에 정말 필요하다고 생각한다"는 속내를 드러냈다. 코스닥 기업들이 잘못된 경영으로 상장폐지에 이르고 일반 투자자에게 막대한 손해를 입혔기 때문에 '법률지원'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신회장의 의지대로라면 코스닥 상장 1035개, 유가증권시장까지 포함하면 총 1766개사가 준법지원인을 고용해야 할 판이다.

변협이 언제부터 오지랖 넓게 증시 건전성까지 걱정하는 시장 관리자 내지 감독당국의 입장을 갖게 됐는지 모르지만 일반인이나 투자자들이 갖고 있는 변호사의 이미지는 그런 '호민관'과는 거리가 멀다.

인기를 끌고 있는 TV 드라마 '마이더스'를 보면 천재 변호사 김도현(장혁)이 벤처기업 주가를 3000원에서 4만원까지 끌어올리는 '작전꾼'으로 등장하고 있다. 실제 증시에서도 법률지식으로 무장, 코스닥 시장의 작전꾼들과 한통속이 돼 시장을 어지럽히는 변호사들이 한 둘이 아니다.


물론 문제를 일으키는 상장사, 특히 코스닥 기업들이 많은 것은 맞다. 그래서 상장폐지 관련제도나 불법행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하고, 사외이사, 감사위원회, IFRS 등 각종 지배구조 개선방안이 도입되고 있다. 물론 앞으로도 지배구조를 선진화하고 주주의 권한을 보장할 수 있는 제도적 보완이 필요한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걸 핑계로 기업들이 원하지도 않고 필요성도 없는 고액 변호사 일자리를 낼름 떠안길 일은 아니다.

감사위원회나 사외이사도 경영진을 견제하지 못하는 마당에, 사장에게 월급받는 `준법 지원인돴이 감시할 수 있을지 의문이다. 준법감시인에게 대리 과장 직함을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니 적어도 감사급 권한과 연봉은 줘야 할 것이다. 그도 아니면 사외이사처럼 이름만 걸어두는 또 하나의 '준조세'직책이 될게 뻔하다.

변호사들의 숟가락 얹기는 증시에서 머물지 않고 경찰 지방자치단체 등 전 사회로 뻗쳐 나갈 모양이다. 경찰에는 '호민관' 변호사에게 무궁화 세 개, 경정 계급장을 달라고 나섰다니 그 '통 큰 욕심'이 존경스러울 정도이다. (올해 증권거래소 공채에서는 평직원으로 지원한 변호사들이 모조리 떨어졌다).

내년이면 로스쿨 졸업생 1500명, 사법연수원생 1000명 등 총 2500명의 법조인이 나온다. 이들 법조인에게 과거 극소수가 뽑히던 '등용문' 사법고시 시절의 특혜를 요구하는건 낡은 특권의식에서 한발짝도 나가지 못한 것이다.

변호사들은 대검찰청, 대법원과 함께 대한변협을 법조계 '3륜'으로 부른다. 단순히 변호사들의 이익을 챙기는 로비단체가 아니라 불합리와 불공정을 감시하는 '사회의양심'이라는 자부심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신임 신회장은 변협 선거에서 준법지원인제도를 공약으로 내걸었고, 법률 통과 과정에서도 큰 역할을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새 변협회장의 첫 작품이 '밥그릇 챙기기'여서야 남우세스런 일이고, 변호사들의 자존심에도 상처를 주는 일일 것이다.

문제는 아무리 여론이 들끓고, 당사자들이 부당함을 호소해도, `법돴이라는 이름으로 통과되고, 정부는 밀어 부치는, 그런 식의 행태가 우리 사회에 굳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언제까지 이런걸 감내하고 살아야 하는지 모르겠다. 그럴수록 정신 바짝 차리지 않으면 어디서 준법지원인 같은 또다른 '전봇대'들이 우리 곁을 파고 들지 모르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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