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신춘문예 대상 수상작]아버지의 여로<4>

머니투데이 임성간 2011.01.01 11: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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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니아와 헤어진 이후 수 개 월간, 아버지는 북예멘 정부와의 대형 군장비 계약을 성사시켰고, 계약체결 이후 카이로 지사로 발령을 받았다. 일기에 보면 아버지는 어머니를 불러들인 카이로에서의 생활 중에서도 라니아를 잊지 못했다. 아파트 베란다에 나와 하늘의 별을 바라보면 저절로 라니아가 생각난다고 했다.

"불과 서너 시간을 같이 있었을 뿐인데 어떻게 그렇게까지 일생을 두고 그리워하는 사이가 될 수 있는지. 저로서는 상상이 되지 않습니다. 부인께서는 이해가 되시는지요.” 



나는 여자를 쳐다보았다. 여자도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나를 마주 보았다.
“흔한 일이라고 할 수도 없지만 드문 일이라고 할 수도 없겠지요. 나도 이런 기억이 있어요. 16살 때였어요. 어머니를 따라 어느 결혼식장에 갔다가 어떤 젊은 남자와 얼굴을 마주 쳤는데 갑자기 온몸이 전기에 감전 된 듯했어요. 서로 얼굴을 다른 데로 돌리지 못하고 빤히 쳐다만 보면서 어머니 손에 끌려 헤어지고 말았습니다. 그 남자의 눈빛을 나는 지금도 말 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라니아가 아버지께 보낸 편지에는 이렇게 적혀 있었다.

안녕하셨는지요?
뵌 지 벌써 8개월이 지났군요. 먼저 저를 소개해드려야겠지요.
저의 이름은 라니아이고 금년에 열일곱 살입니다. 아버님은 왕가(王家) 출신의 엄격하면서도 개명되신 분으로, 제가 9살 때 저의 교육을 위해서 이집트인 가정교사와 영국인 영어교사를 채용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일반학교에는 다니지 않고, 모든 교육을 집에서 모신 선생님과 부모님으로부터 받았었지요. 그러나 외출도 마음대로 할 수 없고 친구와 사귈 수도 없는 저의 성장기는 꿈 많은 소녀로서는 감옥과도 같은 생활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석 달 후에 제 사촌과 결혼식을 올리게 됩니다. 혹시 실망하셨는지요?
이곳 풍습에서는 사촌과의 결혼이 드물지 않는 일입니다. 저로서는 이 결혼을 정말 하고 싶지 않지만 아버님이 정혼하신 일이라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정혼을 한 이 2년여 간 저 혼자서 많이 울기도 하였습니다.

당신을 만나던 날, 저는 장래 남편의 아버지인 삼촌을 만나고 오던 길이었습니다. 그날, 사막 한 가운데에서 한 외국인을 태워 달라는 택시기사의 간청에 처음 저는 몹시 망설였습니다. 이곳 우리 풍습에서는 여성은 외간 남자와 엄격히 격리되어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전혀 모르는 외국인이야 더 말할 나위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차가 고장이 나 꼼짝도 못하는 외국인을 거절할 수도 없는 상황이었지요. 그러면서도 한편 저는 외국인 남자가 어떤 분인가 호기심이 생기기도 해서, 당신이 짐을 들고 우리 차 쪽으로 올 때 당신의 모습을 자세히 보았습니다. 몹시 깔끔한 젊은 동양의 신사인 당신의 모습을 처음 본 순간, 저의 가슴은 몹시 두근거렸습니다.

철이 들기 시작한 이후, 친지 이외의 외간 남자를 가까이 접하여 본 일이 없는 저로서는, 당신같이 젊은 동양의 신사와 둘이서 같이 차를 탄다는 그 자체가 참으로 가슴 떨리는 일이었습니다. 저는 당신이 차에 오르고 난 후 한참을 두근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느라 애썼고, 그 뒤 당신이 말을 걸어오기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당신은 아무 말이 없었습니다.


기억하시나요? 그래서 제가 먼저 용기를 내어 당신에게 말을 건넸었지요. 저는 처음엔 당신이 일본 사람인 줄 알았습니다만, 당신이 한국 사람이라고 하였을 때 조금 당황하였습니다. 사실 저는 일본과 달리 한국에 대해서 거의 아는 바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습니다. 당신의 모습이 너무나 좋았기 때문입니다.

당신과의 대화가 끊기고 나서, 당신과 할 이야기를 이리저리 생각하였지만 쉽사리 이야깃거리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당신도 말을 잘하지 못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도 그 날 저는 너무 행복했습니다. 특히 당신이 시바 여왕이 당신만큼 아름다웠을까요, 라고 말했을 때 그 순간 황홀해지던 제 마음을 어떻게 다 표현할 수 있을까요. 제 일생을 통하여 그렇게 행복했던 순간을 가져 본적이 없었습니다.



저는 별들을 무척 사랑합니다. 그날따라 별빛이 유달리 아름다웠었지요.
밤이면 6층에 있는 남쪽의 제 방으로 수많은 별들이 금방이라도 쏟아질 듯이 반짝거립니다. 그래서 저는 사춘기에 들면서부터, 흔히 그 나이 때의 소녀들이 그러하듯 밤마다 별들을 바라보며 아름다운 왕자님을 꿈꾸었습니다. 그 날, 저는 계곡을 지나는 차의 차창 밖 별들을 바라보면서 제 방에서 날마다 보던 별들을 떠 올렸습니다. 그리고 지금은 제방에서 별들을 보면서 당신과 함께 차안에서 보았던 별들을 떠올립니다.

그날 차가 호텔에 도착하였을 때, 당신은 작별 인사를 하고 차에서 내렸다가 다시 돌아와서 저에게 명함을 주었습니다. 말씀 드렸듯이 저는 이미 정혼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저는 거절하지 않았습니다. 아니 떨리는 마음으로 받았습니다. 그리고 언젠가는 한 번은 편지를 하리라 마음먹으며 책갈피 속에 깊이 간직하였습니다.

멀리 동쪽의 끝에서 온 당신!
당신과의 짧은 여행은 정말 행복했습니다. 저는 저의 이 마음을 꼭 당신에게 알려드리고 싶었고, 또 저의 이 마음을 제 가슴속에서 지워지지 않게 고이고이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이런 소중한 추억을 주신 당신에게 너무 고맙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이제 작별을 하려고 합니다. 눈물이 나려고 하는군요. 부디 부디 오래도록 행복하시기 바랍니다.
안녕히.
라니아 드림



“저, 한 가지 물어보고 싶은 것이 있는데 괜찮을런지요?”
“네, 아버지에 대해서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얼마든지 물어보세요.”
“저, 아버지에 관한 것이 아니고…….”
나는 잠시 망설였다. 쳐다보는 여자의 새까만 눈이 더욱 커진다.
“저, 혹시 지금 결혼생활이 행복하신가 해서요?”
여자는 금방 당황해 하고 있었다. 나는 얼른 말을 이었다.
“제 질문이 무례했다면 용서하세요. 말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아녜요. 괜찮아요. 이야기 못 할 것도 없어요.”
붉어지던 여자의 얼굴이 곧 제 색깔로 돌아갔다. 얼굴에 번지는 미소가 쓸쓸하다.
“저는 남편의 얼굴도 모르고 결혼했어요.”
여자는 잠시 짧은 한숨을 쉬었다.
“저도 시아버지와 친정아버지가 같은 집안이예요. 집안끼리 결혼한 거지요. 저의 남편은 그때나 지금이나 사업밖에 모르는 사람이예요. 지금도 사업 때문에 남아프리카에 가 있지요. 1년에 반 이상을 그쪽에서 보내요. 결혼이란 게 정말 이런 게 아닐 터인데 싶고……”
여자의 눈이 멀리 창밖을 향했다.
“차 한 잔 갖다드릴까요?”
여자는 생각에 빠져 있는 내 얼굴을 유심히 쳐다보며 물었다.
“아, 아니요. 됐습니다.”
나는 자켓 안쪽 주머니에서 누렇게 퇴색이 된 편지를 꺼내어 그녀에게 내밀었다.
“이게 뭔가요?” 
“언니께서 제 아버지에게 보냈던 편지입니다. 한 번 읽어 보시렵니까?”

비좁은 골목을 따라 양쪽 건물들 위로 파란 하늘이 띠처럼 이어지고 있었다. 햇빛이 하얗게 쏟아지는 인적 없는 골목 안엔 낯선 정적이 흐르고, 골목 구석구석에 드리워 진 짙은 그림자가 이방인의 고독과 두려움을 부추겼다. 내가 길을 잃은 것인가. 그녀의 집을 나와 생각에 잠겨 걷던 나는 세 번이나 막다른 골목길에서 돌아 나오면서 비로소 내가 미로 속을 헤매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는, 그녀가 문밖을 나오면서 외지인에게 이곳은 미로이므로 골목길을 빠져나갈 때까지 배웅을 해주겠다고 했음에도 끝까지 사양한 것을 후회했다.

꼬르도바의 골목이 미로라는 것을 알기는 했어도 좁은 성안의 골목이라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게 아니었다. 어디서든 쉽게 구별되지 않는 엇비슷한 하얀 담벼락 사이로 좁디좁은 길들이 끊임없이 연결되었다. 이리저리 난 길 중 한 곳으로 방향을 잡아 가다보면 또 막다른 골목이었다. 이렇게 막다른 골목에서 몇 번 돌아 나오곤 하다 보니 나중에는 어디가 어딘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었다. 나는 그만 완전히 무력감에 빠졌다. 바짝 불안해진 마음으로 여기저기 두리번두리번 거렸다. 하지만 씨아스타 타임이라 골목 안은 섬뜩하리만큼 조용하기만 했다. 갑자기 공포감이 사정없이 나를 엄습해왔다.



그때였다. 문득 어느 집 베란다 창문 안에서 두런두런 사람의 말소리가 아주 낮게 들려왔다. 그 죽음 같은 고요함 속에서 들려오는 사람의 말소리가 그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그 순간,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고 사람 소리가 나는 곳을 향해 온 신경을 모아 귀를 기울였다. 한낮의 묘한 정적 속에서 사내의 나지막한 소리 끝에 어린아이의 옹알이 같은 소리가 들려왔고 이어서 투명한 여인의 웃음소리가 터졌다. 나는 그만 두려움과 긴장에서 풀려나며 눈에서 눈물이 핑 돌았다. 언뜻, 앞에 보이는 골목 끝 파란 하늘 위로 메즈키타의 탑이 우뚝 높이 솟아 있었다.

생각에 잠겨 어떻게 걸었는지 모르게 걷다보니 카달키비르 강 위의 로마다리를 건너 신시가 쪽의 카라호라 탑 앞에 서 있었다. 로마다리 너머 구시가를 바라보았다. 이슬람과 기독교 문화가 공존하는 고즈넉한 중세도시의 풍경이었다. 건물의 긴 그림자가 서서히 어둠 속에 묻히며 코르도바는 하루의 휴식에 들어가고 있었다. 시계를 보았다. 오늘이 22일, 지금 움직여도 파리 행 밤 열차를 탈 수 있다. 내일 아침이면 파리에 도착할 것이고 인천행 오후 비행기를 타기 전 백화점에 들를 시간도 있을 것이다. 나는 아내의 속옷 사이즈를 생각하면서 다시 로마 다리를 건너 구시가지 쪽으로 서둘러 걷기 시작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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