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신춘문예 대상 수상작]아버지의 여로<3>

머니투데이 임성간 2011.01.01 1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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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3-4분 쯤 걸었을까. 역시 하얀 2층의 벽돌 건물에 있는 아치형의 예쁘장한 철창 대문을 밀고 안으로 들어갔다. 이름 모를 관엽식물이 잘 손질된 널찍한 정원이 나왔다. 중앙의 분수에서 물이 높게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여자가 현관을 향하여 소리를 지르는 것과 동시에 안에서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슬리퍼 끄는 소리가 들렸다. 곧 검은 바탕에 붉은 장미가 수놓아진 화려한 홈드레스를 걸치고 머리에는 금실과 초록실의 아라베스크 문양이 수놓아져 있는 히잡을 쓴 여자가 내 눈 앞에 나타났다. 새카맣고 깊은 눈이 나를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섰다. 하얀 얼굴에 살짝 살이 오른 중년의 미인. 내 눈은 단숨에 그 여자의 모습 전체를 훑었다. 새카만 깊은 눈동자와 긴 속눈썹이 어딘지 우수를 띄고 있다고 생각했다. 조용한 모습이었다. 여자는 보일 듯 말 듯한 미소로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나를 데리고 온 여자와 몇 마디 말을 주고받았다. 나를 데리고 왔던 여자는 나에게 살짝 미소를 띠우고 돌아갔다. 나는 뛰는 가슴을 진정시키며 그 여자를 따라 거실로 들어갔다. 넓은 거실에는 아랍문양이 수놓아진 붉은 계통의 카페트가 깔려있고 그 위에 큼직하고 푹신한 녹색의 소파가 놓여 있었다. 소파 위의 레이스가 달린 방석과 머리받이천의 하얀 색이 눈이 부셨다, 거실 전체가 밝고 정갈하면서도 안온한 느낌을 주었다. 나는 그 여자가 가리키는 자리에 긴장하며 앉았다.



“뭐로 드실래요. 커피, 홍차, 쥬스 뭐든 마시고 싶은 대로 시키세요.” 
여자는 유창한 영어를 구사했다. 물을 마시겠습니다, 라고 내가 말하자 여자는 안을 향하여 큰소리로 무어라 했고 잠시 후 14-5세쯤 되어 보이는 하녀가 소반에 올려온 컵을 내 앞의 옥색 대리석 테이블 위에 조심스레 놓았다. 튤립 모양의 컵 가장 자리에 황급 빛이 번쩍거렸고 하얀 컵 속에 투명한 물이 담겼다. 여자는 테이블 너머 내 건너편에 앉아서 나를 관찰하듯 조용히 바라보았다. 이 여자가 라니아인가. 나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고 있었고, 그 여자도 아이보리 색 실크 커튼이 휘장처럼 젖혀 드리워진 아치형 창 너머를 바라보며 아무 말이 없었다.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비로소 차창 밖의 광경이 하나씩 눈에 들어왔다. 아직도 차는 사막을 지나고 있었다. 낙타를 모는 사람이 낙타에 가려서 보이지 않는지 낙타들만 간간이 줄을 지어 지나갔다. 밖은 벌써 어둠이 내리고 있었다. 여인의 젖무덤 같은 탐스런 모래 언덕 저 너머 아득한 지평선 위로 황갈색 낙조가 마지막으로 남기던 가느다란 붉은 띠마저 어둠 속에 묻혀버렸다. 사막은 갑자기 고요해졌다. 별들이 여기저기에서 살짜기 자기의 존재를 드러내는가 싶더니 어느 새 무수히 나타난 별들은 온통 검푸른 하늘을 덮고 자신을 과시하듯 마구 반짝거렸다. 여인도 지금, 나처럼 저 별들을 보고 있을 것이었다.



아! 별들이 너무나 아름답구나!
차는 이제 사막을 벗어나 산악의 고원지대로 오르기 시작하였고, 늙수그레한 기사는 무표정한 얼굴로 앞만 보고 운전하고 있었다. 백미러를 통해 그녀를 잠시 훔쳐보았다. 여인은 조용히 창밖을 응시하고 있었다. 그녀에게 한마디 말이라도 붙여보고 싶은 마음은 간절했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았다. 저 여인과 함께 이 아름다운 밤길을 드라이브를 하고 있는 것만 해도 얼마나 행운인가, 하는 그런 생각에 빠져 있었다. 그런데 그녀가 뜻밖에도 말을 걸어왔다.
"일본인이세요?"
"아, 아닙니다. 한국인입니다."
나는 깜짝 놀라며 대답했다. 정확한 영국 발음이었다. 서구식 교육을 받은 규수임이 분명했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무슨 일을 하는 분이세요?"
"저…… 종합상사의 사우디 아라비아 주재원입니다."
그렇게만 말하면 이해가 쉽지 않을 것 같아서, 또 대화를 계속해서 이어가고 싶은 마음에서, 종합상사에 대해서 천천히 설명을 했다. 비로소 용기를 내어 백미러로 그녀의 눈을 정면으로 쳐다보았다. 속눈썹이 무척 길었다. 무슨, 깊은 생각을 담고 있는 듯한 깊고 검은 눈 속으로 내가 빨려들 것만 같았다. 아니 그 속으로 빨려들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대화를 이어가고 싶은 욕망은 간절한데 적당한 화제가 떠오르지 않았다. 차의 엔진 소리만 규칙적으로 들릴 뿐 또 다시 침묵이 흘렀다. 그러나 마음은 그지없이 황홀했다. 차는 별빛이 흐르는 산악지대의 골짜기를 지나고 있었고, 별빛에 부딪치어 반사되는 벤츠의 하얀 보닛이 아라비아의 신비한 분위기를 사방으로 발산하고 있었다.

“아버님이 13년 전에 돌아가셨다고요.”. 
그 여자가 먼저 침묵을 깨었다.
“네."
“여기는 어떻게 알고 찾아오셨나요. 아버님이 말씀하셨던가요.?”.
“아닙니다. 아버지는 전혀 말씀한 적이 없었습니다. 아버지가 이곳에 계실 때 편지를 한 번 주신 적이 있었고, 자세한 내용은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 아버지의 일기를 보고 알게 되었습니다.” 
“그랬군요. 어머님도 다 알게 되셨나요?” 
“어머니는 전혀 모르고 계셨습니다. 지금은 돌아가셨지만요.” 
“아, 안됐군요. 어머님한테는 몹시 미안한 일이지요. 아드님에게 이런 말 하기는 정말 무엇하지만…… 언니는 행복하게 돌아가셨어요.” 
“네?…….”
나는 잠시 혼란스러워져 그녀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아버님도 한국에 가서 금방 돌아가신 걸 보면 아마 언니를 따라가셨던 건지도 모르겠군요. 아드님에게 이런 말 하는 것이 적절하지는 않지만…….”. 
아, 라니아는 죽었고, 이 여자는 라니아의 동생이구나.
“언니는 아버님이 여기 와 계실 때 돌아가셨고. 다행히도 아버님께서 제 언니의 눈을 감겨드렸습니다. 언니는 자궁암의 고통 속에서도 행복한 모습으로 죽었습니다.” 
나는 일생을 외롭게 살았을 어머니를 떠올리며 복잡한 심정이 되어갔다.
“언니는 결혼한 지 11년 만에 이혼을 했어요. 아기를 낳지 못했지요. 언니는 이혼 전부터 꽤 오랫동안 우울증으로 고생했었는데, 그래서 내가 이곳으로 오게 했어요. 처음부터 이곳에서 보석상을 하며 자리를 잡고 있던 남편한데 시집을 온 저는 언니를 도와야겠다고 생각했어요. 언니가 죽기 2년 전에 언니를 불렀어요. 그런데 이곳에 와서 받은 종합검진에서 자궁암이 발견된 거예요. 그 후 계속 치료를 받았는데…… 참 우연치고 너무나 신기하게도 병원에서 시한부 삶의 선고가 내려진 바로 다음 날 아버님께서 싸나를 거쳐 이곳에 언니를 찾아왔답니다.”. 


창의 커튼 사이로 보이는 새파란 하늘에는 하얀 뭉개구름 하나가 무심히 흐르고 있었다. 여자는 홍차로 목을 한 번 축이고는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버님은 이곳에 와서 처음엔 언니를 만날 수 없었어요. 언니는 자신의 병든 모습을 보이기 싫어 한사코 아버님을 만나지 않으려 했어요. 2층에서 내려오지도 않고 울기만 했지요. 아버님이 매일 꽃을 들고 우리 집을 찾아오고, 내가 언니를 매일 설득하고 했지요. 그렇게 40여 일이 지나서야 아버님은 겨우 언니를 볼 수 있었지요. 언니가 아버님을 만나기로 한 날, 언니는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어요. 거울 앞에서 처음 화장을 하는 소녀처럼 오랜 시간을 화장을 고치고 머리를 만지고 이 옷 저 옷을 입어보며 안절부절못했지요. 여자의 행복이란 어떻게 보면 매우 단순한 것이지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것, 그것 아니겠어요. 젊어 한 때의 사랑이란 그냥 지나가는 감정의 유희 같이 보일 수도 있지만, 일생을 두고 잊을 수 없는 가장 빛나고 아름다운 시절의 가장 빛나고 순수한 감정이기도 하지요.



참! 지난번 길에 이 골짜기를 지나면서 어느 미술관에선가 본 적이 있는, 시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찾아가는 그림의 배경이 이 골짜기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던 것이 언뜻 떠올랐다. 적합한 화제를 찾아 낸 것이다.
"시바 여왕이 솔로몬 왕을 찾아갔을 때 혹시 이 길을 지나가지 않았을까요?"
"시바 여왕이 어느 길로 갔었다는 이야기는 들어 본적이 없어요. 외국 분들은 유난히 시바 여왕에 대해서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하하, 그런가요. 시바 여왕의 아름다움과, 그리고 솔로몬 왕과의 로맨스 때문이겠지요. 시바 여왕이 당신만큼 아름다웠을까요?"
나는 말 끝머리에 불쑥 이런 식으로 내 마음을 대담하게 표현했다. 그리고는 백미러로 얼른 그녀의 표정을 살펴보았다. 눈과 뺨만이 보이는 얼굴이었지만 순간, 당황하는 듯한 표정이 역력히 읽혀졌다. 백미러 속의 저 고혹적인 여인은 내 유년기 이래 환상 속에서만 존재해오던 아라비아의 공주인가. 나는 지금 꿈을 꾸고 있는 것일까. 내 몸과 마음이 구름 위에 둥 둥 떠 있었다.

차가 호텔 앞에 멎는 소리에 눈을 뜨고 그녀를 향해 뒤를 돌아보았다. 내 눈 안 가득히 들어오는 저 얼굴, 긴 속눈썹의 깊고 검은 눈, 나를 쏘아보는 듯한 강렬한 눈동자 속에 내가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말하고 말았다.
"감사합니다. 덕분에 잘 왔습니다. 안녕히."

그녀는 내가 표정을 읽을 수 없는 조용한 미소만을 지었다. 일부러 천천히 내려 차 문을 닫고 트렁크로 가서 짐을 내리는 시간동안 머릿속에서는 또 한 번 생각들이 요동치고 있었다. 다시 문을 열고 한번 만나고 싶다고 이야기할까. 그러나 차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나는 엉겁결에 조급히 몇 발짝 따라 옮기며 그녀의 옆 차창을 두드렸다. 차가 잠시 서며 유리창이 스르르 아래로 내려왔다.



나는 내 명함을 그녀에게 내밀었다. 그녀는 잠시 멈칫 하더니 내 명함을 받았다. 아무 말이 없었다. 그리고 하얀 벤츠는 미끄러지듯이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멍하니 차가 사라진 어둠 속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 자리에서 떠나질 못했다. 뒤늦은 후회와 슬픔이 온몸에 밀려들었다. 그녀의 이름과 주소를 알아냈어야 했었는데…….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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