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신춘문예 대상 수상작]아버지의 여로<1>

머니투데이 임성간 2011.01.01 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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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달려가던 기차는 아직 새벽의 푸른빛이 채 가시지 않은 마드리드의 체마르틴역에 도착했다. 사람들은 밤을 새운 부수수한 얼굴로 짐을 챙기며 서둘러 내리기 시작했다. 나는 그대로 앉아 찌뿌드드한 몸을 추스르며 차창 밖으로 승객들이 밀려나가는 광경을 보고 있었다. 날씨가 추운지 사람들은 몸을 움츠리며 외투의 깃을 목 위까지 잔뜩 올리고 있었다,

그들의 입과 코에서 나오는 하얀 김이 찬 공기 속에서 옅게 흩어졌다. 중절모에 두터운 양복을 입은 한 남자가 마중 나온 아내와 두 딸을 각각 양팔로 포옹을 했다. 빨간 머플러를 두른 너덧 살쯤 되는 작은딸은 달랑 아빠 품에 안겨 양팔로 아빠의 목을 감고, 예닐곱 살 먹어 보이는 큰딸은 아빠의 허리를 감고 그곳에 얼굴을 묻고 있었다. 포옹이 끝나자 두 자매는 손을 잡고 앞쪽에서 깡충깡충 뛰듯이 걸었고, 중년의 부부는 짐을 나누어 들고 즐거운 듯이 서로 마주보고 이야기도 하며 역 출구로 나란히 걸어갔다. 나는 그들이 나가는 뒷모습이 승객들 속에 묻혀 보이지 않을 때까지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마지막 승객들이 몇 명 나가는 것을 보고서야 비로소 나는 천천히 일어나 가방을 챙겨들고 승강기에서 내렸다. 차가운 대기가 얼굴에 닿으며 정신이 번쩍 들기는 하였으나 온 몸에 쌓인 피로가 그대로 느껴졌다. 어제만 해도 파리에서 열차로 왕복 3시간과 4시간이나 걸리는 거래처 두 군데를 방문하고 저녁 8시에 허겁지겁 마드리드로 출발하는 야간열차를 탔었다.

승객들이 다 빠져나간 썰렁한 역 앞으로 나오니 후두둑 굵은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마침 바로 내 앞으로 달려온 택시를 타고 파리에서 예약해두었던 마드리드 솔 광장 근처에 있는 호텔에서 여장을 풀고 간단히 샤워를 했다. 스페인 상공회의소를 방문하기로 한 시간은 오후 4시 30분, 아직 시간은 여유가 있었다. 침대에 그대로 앉아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았다, 비가 계속 내리고 있었고 빗줄기 사이로 보이는 세상은 온통 희뿌옇게 젖고 있었다. 크리스마스를 불과 나흘 앞두고 있었다.



“알았어요. 마음대로 하세요.” 
밀라노의 한 호텔에서 서울로 전화를 걸어 갑자기 마드리드에 가봐야 할일이 생겨 출장을 연장하게 되었다고 말했을 때 아내의 대답은 냉랭하고 짤막했다. 그리고 내가 그 이유를 설명할 틈도 주지 않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원래는 밀라노에서 파리를 거쳐서 바로 서울로 들어가려고 했다. 물론 서울에서부터의 비행기 표도 그렇게 끊어왔다. 실은, 목적지는 마드리드가 아니었다. 코르도바였다. 그러나 코르도바로 행로를 바꾸면서 이왕이면 마드리드에 들러 평소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스페인 시장조사를 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빗줄기가 갈수록 긁어지고 있었다. 구름도 낮게 깔리어 방안이 이미 컴컴해졌으나 나는 불을 켤 생각도 하지 않은 채 멍하니 창밖의 빗줄기를 바라보았다. 아버지 생각을 했다. 이번 출장을 나올 때부터 내 의식 깊숙이 코르도바 여행을 염두에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금년 들어와 부쩍 아버지 생각을 자주 했다. 지금 내 나이 때의 아버지 모습, 그리고 그때부터 초로의 모습을 띄우며 늙어가던 아버지의 얼굴이 자꾸 떠오른 것이다. 언제나 회사 일에만 묻혀 지내던 아버지, 그래서 어쩌다 집에 있을 때도 거의 말이 없었고 한 번 서재에 들어가면 좀처럼 나오시지 않던 아버지, 그런 아버지에게 나는 부친으로서의 정을 거의 느껴보지 못했다. 내가 알고 있는 한 아버지는 평생 어머니와 건조한 관계에 있었고, 어머니에 대해 절대적인 애정과 존경심을 가지고 있던 우리 형제들이 그런 아버지를 좋아하지 않았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했다.


내 기억으로 아버지는 일 년에 3-4개월은 해외출장을 다녔다. 서울에 있을 때도 아버지는 밤 열두 시 통행금지시간 직전에 집에 들어오는 일이 잦아서 우리가 아버지의 얼굴을 불 기회는 거의 없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아버지는 휴일에는 자주 거실에 나와 자식들에게 다정한 모습을 보이고 싶어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러나 그때에도 우리 형제들은 어머니의 치밀한 일정 관리에 의하여 저마다의 스케줄이 있었고, 어쩌다 보게 되는 아버지는 항상 어색하고 불편했다.

그래서 아버지가 거실에 있을 때는 우리는 오히려 방 밖으로 잘 나가지 않았다. 흔치 않게 식탁에서 자리를 같이 했을 때에도 아버지가 몇 마디 물어보면 우리 형제들은 눈을 아래로 깔고 최소한의 대답만 했다, 그럼에도 우리들은 아쉽거나 불편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우리들이 필요한 모든 것은 언제나 어머니가 완벽하게 다 갖추어 주었다. 심지어 대학을 선택하고 학과를 결정하는 데까지도 그랬다. 어머니가 우리들의 적성과 능력을 파악하고 있는 것은 물론이고 대학입시의 경향과 진로에 이르기까지 완벽한 정보를 가지고 결정하였으므로 우리들은 오직 어머니의 결정을 따르기만 하면 되었다.



퇴직을 한 이후 한동안 서재에서 두문불출하던 아버지는 그 이듬해 한 번은 2개월, 또 한 번은 9개월, 이렇게 두 번 해외여행을 하고 돌아왔다-대학을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때, 나는 아버지의 부재에 대해서 조금도 궁금하게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우리가 보기에는 마치 가출이라도 하듯 어느 날 새벽 소리 없이 떠났던 아버지는 꼭 한 번 어머니에게 편지를 보내왔다. 스페인의 코르도바에서였다. 그리고 두 번째 여행에서 돌아온 지 3개 월 후, 아버지는 갑자기 심장 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그때 집에는 아무도 없었다. 아버지는 빈집에서 홀로 세상을 떠나신 것이다. 향년 57세였다.

아버지를 떠나보내는 어머니는 우리에게 눈물을 보이지 않았다. 장례식은 차분하고 조용하게 치러졌다. 상주인 나도 조문객들의 시선이 신경이 쓰였을 정도로 전혀 눈물이 나오지 않았다. 한 명의 남자 동생과 두 명의 여동생도 마찬가지였다. 매우 죄송한 일이었다. 하지만 그러한 가족관계는 최소한 아버지 자신이 초래했던 것이었다. 아버지는 왜 그렇게 스스로 외로운 삶을 살다 갔을까? 내가 오랫동안 품었던 그러한 의문은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에야 어느 정도 풀 수 있었다.

장례식을 치른 후, 어머니는 눈에 뜨이게 초췌한 모습을 하고 있었으나 극히 담담한 표정으로 아버지의 유품 하나하나를 정리해 나갔다. 그리고, 아버지 서재에 있던 800여 권의 책들과 아버지가 회사에서 쓰던 60권이 넘는 비즈니스 다이어리는 내가 알아서 처리하라고 했다. 내가 그 책을 정리하는 데에는 꼬박 일주일이 걸렸다. 누렇게 종이가 변질되고 싹아 코까지 메케해지는 6,70년대 발간된 문학 전집류 등의 책들은 모조리 버렸다. 80년대 이후 발간된 책들 중 내가 볼만한 경제와 경영에 관한 서적만 조금씩 골라내었다. 다음, 아버지가 다녔던 회사의 금박 로고가 아직도 선명한 비즈니스 다이어리들은 비교적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었다.



다이어리에는 일일업무, 주간업무, 상담내용 등이 매우 꼼꼼하고 정갈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그때그때 아이디어가 떠오를 때마다 적은 듯한 메모 형식의 시장전략에 대한 아이디어나 거래처 대응방안 같은 것들도 적혀 있었다. 당시, 나는 회사에 들어간 지 2년밖에 되지 않았지만, 빠른 시일 안에 월급쟁이 생활을 정리하고 내 사업을 시작하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때이라 이런 내용에 관심이 많았다. 60여권의 회사 다이어리 중에서 아버지의 업무와 직접 관련이 없는 일기책 두 권이 나왔다.

나는 야릇한 호기심을 느끼면서 한 장 한 장 넘겼다. 해외출장 중 그때그때 떠오르는 단상들이었다. 그중에 무엇보다 나의 흥미를 끄는 긴 글이 있었다. 그것은 거의 한 편의 단편소설에 가까운, 한 때 아버지가 젊은 시절에 만났던 한 여자에 관한 이야기와 그리고 그 다이어리 속에 접혀 있는, 퇴색된 한통의 영문 편지였다. 아니 어쩌면 아버지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한 편의 단편소설로 썼는지도 몰랐다. 나는 일기책을 덮고도 한참 동안 아버지의 이야기 속에 빠져있었다. 이때, 나는 처음으로 아버지의 일생을 생각해보았고 또 아버지를 이해해보려는 태도를 가지게 되었지만 결코 아버지를 이해했던 것은 아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2년 뒤 나는 중학교 수학교사인 아내를 중매로 만나 결혼을 했고 딸과 아들을 각각 하나씩 두었다. 그리고 결혼 다음 해에 나는 적지 않은 불안감을 가지면서도 대기업의 직장생활을 접고 내 사업을 시작했다. 이후 한동안 나는 내 생존의 기반을 구축해나가느라 정신없이 바빴고 또, 무척 피곤하고 힘든 세월을 보냈다. 바삐 돌아가는 와중에 아버지가 전혀 생각이 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아버지의 존재는 점점 내 머리 속에서 희미해져갔다.



아버지에 대한 생각이 다시 나기 시작한 것은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지난해부터였다. 그때 즈음해서 이따금 내 나이 때의 아버지 모습이 떠오르기 시작했다. 어느 날 문득 거울 속에 비친 내 얼굴에서 얼핏 아버지의 모습을 보았고. 그 후 거울을 볼 때마다 나는 내 얼굴에서 점점 더 아버지의 모습을 어김없이 닮아가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나의 외형적 모습만이 아버지를 닮아간 것이 아니었다. 가족에서의 위상까지도 아버지를 그대로 닮아가고 있었다. 휴일에야 겨우 얼굴을 보게 될까 말까하는 아이들의 석연찮게 어색해 하는 눈빛에서, 또 지난밤 마신 접대술에 쓰린 속을 가라앉히며 늦게까지 이부자리에 누워 있는 날, 아내가 먼저 출근하며 같은 아파트 단지에 살고 있는 친정에 아이들을 맡기려고 데려나갈 때의 아내와 아이들이 내는 그들만의 밀착된 언어에 귀를 기울이며 나는 쓸쓸히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코르도바로 행로를 변경하게 된 것은 이태리 북부의 한 호숫가에서 일어난 내 감정의 급격한 변화 때문이었다. 출장의 막바지 단계에 이른 밀라노에서의 이틀 동안, 나는 두 컨테이너 분의 공구류 계약에서 집요하게 가격을 치고 들어오는 바이어와의 밀고 당기는 긴 협상에서 매우 지쳐버렸다. 자기가 원했던 가격에 근접하여 계약을 성사시킨 바이어는 무척 피로해 하는 내가 안쓰럽게 생각되었던 모양이었다. 머리도 식힐 겸 공기 좋은 교외로 나가자며 호텔 방에서 혼자 쉬고 싶어하는 나를 억지로 차에 태웠다.

북쪽으로 한참을 달려나가 도착한 곳은 알프스의 산자락이었다. 산 아래 회색의 호수는 물안개로 덮여 있었고, 낮고 두텁게 깔린 구름 아래로 호수는 묵화보다 더 짙은 회색 속에 그림처럼 정지하고 있었다. 온통 호수를 덮고 있는 그 어둡고 칙칙한 빛깔 때문이었을까. 짙은 회색의 정경 속에서 갑자기 가슴 깊이 묻혀있던 서러움이 왈칵 복받쳐 올라왔다. 어린애처럼 그대로 퍼대어 앉아 펑펑 눈물을 쏟으며 마구 울고 싶어졌다. 강하게 키워온 강인한 어머니 덕분이었는지 철이 들은 후 한 번도 울어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놀라운 것은, 그 자리에서 나는 어머니보다 아버지를 더 그리워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모두 몹시 지쳐 있었다는 건 분명했다. 나는 불현듯 코르도바에 가보고 싶었다. 그래, 코르도바로 가자! 코르도바에 가는 거야! 나는 속으로 외쳤다. 그리고 밀라노의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바로 아내에게 전화를 했던 것이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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