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동현 칼럼]IMF에 대한 '통쾌한 복수'

머니투데이 안동현 서울대학교 경제학부 교수 2010.08.18 1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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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7년 미국 노스캐롤라이나 대학에 조교수로 부임한지 1년이 지났을 쯤. 태국에서 시작된 동남아 금융위기가 필리핀 인도네시아 등으로 확산되던 어느 날이었다. 월가에 근무하던 두 명의 박사과정 동창이 급작스레 전화를 해왔다. "다음 공략 대상이 한국의 원화니까 적절히 대비하라"는 거였다.

학술논문 준비에 여념이 없던 필자는 현실경제와 세계 금융시장에 대한 식견이 일반인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전화를 받고도 우리나라와 동남아 국가는 경제력과 그 구조가 본질적으로 다르니 별 문제 없을 거라 단순 생각했다.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얼마 후 우리나라가 국제통화기금(IMF) 관리체제로 들어간다는 뉴스가 들려왔다. 동창들에게 어찌 알았냐 물었더니 "고객인 매크로 헤지펀드 사이에 다음 공략대상이 원화라는 소문이 파다했다"는 답이 돌아왔다.

# 이후 각국의 외환위기 사례를 살펴보다 과연 펀더멘털과 외환위기 간 상관성이 어느 정도나 되나 의아해졌다. 그러다 하버드 교수인 로버트 케네디와 그 제자가 쓴 '통화위기(Currency Crisis)'란 연구를 접할 기회를 얻었다. 익명의 5개 국가의 경제성장율, 물가상승률, 재정수지, 경상수지, 외환보유고, 공정 환율 등 주요 거시경제지표를 제시한 뒤 그 중 환란을 겪은 국가를 지적하고 그 이유에 대해 분석한 거다. 미국의 주요 MBA과정 국제금융 수업의 필독 자료다.



그 중 한 곳이 우리나라였다. 수강생들이 환란 가능성이 가장 낮은 국가로 지목하는 곳이다. 반면 환란 가능성이 가장 높은 국가로 지목하는 1996년의 아르헨티나와 폴란드는 환란을 겪지 않았다. 무려 30개가 넘는 거시경제지표로부터 그간 배운 경제학적 지식을 총동원해 결론 내린 학생들을 허탈케 하기에 충분한 반전의 결과였다. 저자들은 우리나라를 '비합리적 전염효과'의 대표적 희생자로 지적했다.

IMF는 1992년의 러시아, 1994년 멕시코에서 1997년 우리나라까지 모든 환란 국가들에게 동일한 조건을 내걸었다. 재정과 통화긴축정책, 부실기업 정리 및 자본시장의 개방 등 세 가지를 요구했다. 구조조정 자금의 대가였다. 환란이란 병증은 같아도 병의 원인은 상이할 수 있다. 그런데 처방이 항상 동일했다는 건 이해하기 어렵다.

특히 우리나라가 그랬다. 펀더멘털보다 국제금융시장 투기에 따른 단기 외환부족 문제였다. 이런 처방에 대해 스티글리츠를 비롯한 많은 경제학자들이 비난을 퍼부었다. 긴축정책은 환율 안정을 위한 디플레이션 정책이란 점에서 불가피한 면이 있지만, 미국을 비롯한 채권국의 채권회수를 우선시하다보니 과도한 측면이 있다는 게 정설이다.


자본시장 개방은 더했다. 외환위기 치유와 자본시장 개방에 무슨 상관성이 있단 말인가. 개방에 따른 외환 유입으로 단기에 외환부족 문제를 해결할 순 있겠다. 하지만 그 나라 자본시장을 '외국 투기세력의 놀이터'로 전락시킬 치명적 문제를 안고 있다. 장기적으로 환란 가능성을 영구화시킬 수 있다는 거다.

# 지난달 12일 대전의 IMF 아시아 컨퍼런스장. 윤증현 기획재정부 장관은 IMF에 단호한 목소리로 반성과 변화를 촉구했다. 외환위기 당시 IMF의 초긴축정책 탓에 우리나라를 비롯한 아시아 국가들이 겪은 고통을 두고서다. 스토로스-칸 IMF 총재는 정책처방이 일부 잘못됐다고 시인했다. 일부 언론은 이를 '통쾌한 복수'로 타전했다.

복수가 가능했던 건 글로벌 금융 및 경제위기의 진원지가 미국 등 선진국이었던 탓이 크다. IMF는 1997년과 달리 침묵으로 일관하며 선진국들의 꼭두각시임을 자인했다. 선의의 피해자였던 아시아 국가들은 가장 먼저 위기를 극복했다. 상대적 위상이 그만큼 높아졌다.

역사는 반복된다. 우리는 높은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줬지만, 또 어떤 상황에서 IMF를 상대해야 할 지 모른다. 선진국 위주로 되어있는 IMF의 지배구조를 바꾸기 쉽지 않다면 IMF를 두 번 다시 상대하지 않으면 된다. IMF가 '최후의 대부자'라는 사실 자체를 기억에서 없애기 위해 위기관리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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