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150인분 밥푸는 남자의 비밀=꿈 푸는 것

머니투데이 전예진 기자 2010.08.03 10: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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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당당한 부자=소셜 홀릭]오진권 대표의 성공경험 나눔활동

↑ 사당역 14번출구에서 '밥퍼' 봉사활동을 하는 오진권 대표와 자원봉사자의 모습 ↑ 사당역 14번출구에서 '밥퍼' 봉사활동을 하는 오진권 대표와 자원봉사자의 모습


# 오전 10시 반, 다른 식당들이 한창 점심 장사준비로 바쁠 시간이지만 해산물 뷔페식당 '마리스꼬'에서는 이색 사투(死鬪)가 벌어진다. 150인분의 국과 밥, 반찬을 만들어 나르는 일이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밥 수레 행렬이 사당역 14번 출구에 도착하자 지휘자가 뜨거운 국통에서 국물 한 국자를 떠 후루룩 맛을 본다. "합격!" 그제야 배식이 시작된다.

그는 '이야기가 있는 외식 공간'의 오진권 대표다. "매일 이렇게 150인분의 밥맛을 봐야 마음이 놓입니다. 하루라도 거르면 배가 고파요."



◇오전엔 '밥퍼'의 군기반장, 오후엔 '사장님'=오 대표는 150인분을 먹어야, 아니 150인분을 먹여야 사는 사람이다. 지난 8월부터 매일 사당역 14번 출구로 출근한 지도 1년이 지났다. 노숙자들을 위한 '밥퍼' 봉사 때문이다.

"제가 바로 이곳 군기반장입니다. 지난 주 월요일에는 일이 생겨 못 갔더니 아내의 말이 제가 없으니 소란이 생겨서 안되겠다고 하더군요. 여기 오시는 노숙자분들과 어느 정도 안면을 트고 허물없이 지내니까 제가 나가면 난동을 부리는 취객도 없고 이제는 별 탈 없이 식사를 하고 가실 수 있게 됐습니다. 이러니 하루라도 빠질 수 가 있나요. 허허..."



명절, 휴일도 빠지지 않는다. 쉬는 날도 있어야하지 않느냐는 말에 일요일에도 밥은 먹지 않느냐는 게 그의 대답이다. 이쯤 되면 '밥퍼'봉사가 부업이 아닌 '본업' 같다. 그는 배식에 쓰이는 식재료도 식당 것과 같은 신선하고 좋은 것으로 고르고 국물 맛, 밥맛도 깐깐하게 체크한다. 그와 20년을 함께 해온 베테랑 요리사도 혀를 내두를 정도다.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어느 날 국물 맛을 보니 싱겁고 뭔가 빠진 것 같더라고요. 청량고추가 안 들어간 겁니다. 국 끓이는 일을 전담하는 68세 요리사께 어찌된 일인지 물었더니 '사장님, 요즘 청량고추가 얼마나 비싼데 그걸 어떻게 넣느냐'고 하더군요. 그래서 '참모님, 그 사람들은 밤새 술 먹고 속이 다 헤지고 쓰려서 아침에 칼칼한 국을 줘야 삽니다. 비싸더라도 아끼지 말고 팍팍 넣으세요'라고 말했죠."

쌀도 좋은 것을 쓴다. 남은 음식, 값싼 재료를 쓴다면 아예 안하는 게 낫다는 게 오 대표의 생각이다. 매일 150인분의 밥을 하는데 드는 쌀값도 만만치 않을 법한데 그는 한 번도 싼 것을 쓰자는 말을 입 밖에 내본 적이 없다. '어머니가 차려주는 밥보다 맛있게 차려라'는 게 오 대표가 입버릇처럼 주문하는 말이다.


배식시간을 음식준비로 바쁜 10시30분으로 정한 것도 노숙자들이 가장 배고픈 시간이기 때문이다. "아침을 못 드신 분들이 가장 배가 고픈 시간이 10시 반입니다. 이후에는 영업을 해야 하기 때문에 이 시간이 제 형편에도 맞고 적당하다고 생각했죠."

오 대표의 이런 열성에 직원들도 마음을 열고 동참한다. "좀 더 일찍 출근해서 일해야 하는데도 불평불만 없이 나와서 땀을 뻘뻘 흘리며 봉사해주는 걸 보면 고마울 뿐입니다. 만약 제가 조금이라도 다른 마음을 먹는다면 우리 직원부터 저를 보는 눈빛이 틀려지겠지요. 딴 생각 하지 말고 최고로 맛있게, 성의를 다하자는 생각으로 시작한 일인 만큼 초심을 지켜나가려고 합니다."

↑ 오진권 이야기가있는외식공간 대표 ⓒ이동훈 기자↑ 오진권 이야기가있는외식공간 대표 ⓒ이동훈 기자
◇아침마다 밥을 풀 수 있다는 게 부자=오 대표가 '밥퍼'봉사를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적 배고픔에 굶주려 본 경험이 있어서다. 그는 어려웠던 시절을 '피죽으로 하루를 버텼다'고 표현했다. 가세가 기울어 16살부터 구두닦이, 라이터 노점상, 좀약장사 등 안 해 본 일이 없다. 남대문시장 2층 하루 30원짜리 합숙소에서 앵벌이 아이들과 잠자기도 했다.

스물다섯 작은 라면가게에서 시작해 그는 이제 6개의 프랜차이즈를 거느린 외식업계 대부가 됐다. 그에게 '부자'의 의미에 대해 묻자 "아침마다 밥을 풀 수 있다는 게 부자"라는 소박한 대답이 돌아왔다.

"외식사업이 성공가도를 달리면서 국내에 3대 밖에 없다는 고급 외제차도 타봤고, 최고 좋은 집에도 살아봤습니다. 골프도 원 없이 쳐봤고요. 더 이상 더 화려하게 살 순 없다고 할 정도로 사업이 잘된 적도 있었죠. 하지만 그건 축구의 전반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인생 후반전에 와서야 제대로 방향을 찾은 것 같습니다. 배고파봤기 때문에 배고픔의 고통을 알았고 밥을 퍼주면서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지금에서야 진짜 부자가 됐죠."

그에게 '밥퍼'봉사를 하면서 가장 행복했을 때를 물었다. "노숙자 분이 자진해서 봉사해주실 때 정말 뿌듯합니다. 밥과 국을 나르는데 수레가 4개가 필요한데 추우나 더우나 저희 식당 엘리베이터 현관 앞에 와서 기다렸다가 옮겨주시는 분이 계십니다. 식사 후에는 꼭 잘 먹었다고 꾸벅 인사를 하고 가시죠. 어떤 분들은 요구르트 20개들이 한 줄을 사다가 봉사자들 먹으라고 툭 던져놓고 갑니다. 또 꼬깃꼬깃 때 묻은 만원짜리 지폐를 봉사하는 데 보태라고 제 손에 꼭 쥐어주신 분도 있습니다. 날짜를 적어서 아직도 보관하고 있습니다. 또 공격적이고 적대적이던 분들의 눈빛이 바뀌었을 때, 가끔 '좋은 하루 되세요''잘 먹고 갑니다'하고 말 한마디 건네주시는 분들이 생길 때, 이런 일들이 소소한 행복이지요."

◇밥 대신 꿈을 푸는 사장님이 되고 싶다=오 대표는 이제 '밥 퍼주는 사장님'에서 꿈을 퍼주는 봉사도 하고 싶단다. 그는 매장에서 일하는 직원들에게 창업을 지원해주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외식사업에 관심이 많은 젊은이들에게 일할 환경을 만들어주고 업무경험을 쌓도록 도와주는 일이다.

"여기서 일하는 직원들은 모두 음식점 사장이 되는 꿈을 갖고 있어요. 저도 가진 것 없이 시작했으니 저를 보고 힘을 내서 꿈을 키우도록 해주자는 것이지요. 가능성이 있는 직원에게는 지점장을 맡기고 자신의 사업을 꾸릴 수 있는 기반을 갖추도록 해주고 있습니다. 직원들이 일도 하고 경력도 쌓을 수 있도록 도울 겁니다."

직원들 뿐 아니라 학생들에게는 배움의 꿈을 퍼줄 계획이다. "지난 해 7월 '따스한 공부방'을 차렸습니다. 어려운 형편의 아이들이 와서 밥도 먹고 공부할 수 있는 곳입니다. 지금 1년 째 됐는데 사회복지사도 고용했고 보스턴대 , 줄리어드 음대 등 실력 있는 봉사자들이 와서 피아노도 가르쳐 줍니다. 1학기에 공부방 아이들 성적 부쩍 올라갔다고 하더군요. 앞으로 이런 공부방을 본격적으로 운영해보고 싶습니다."

물론 '밥퍼'봉사도 꾸준히 할 계획이다. "꿀꿀이죽 같은 음식을 나눠주면서 노숙자는 자기가 다 먹여 살린다고 폼 재는 사람이 되긴 싫습니다. 제 돈으로 정말 맛있는 밥을 주는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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