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큰스님 말씀 듣던 밤바다, 달을 품었네"

최병일 기자 2010.05.21 08: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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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부처님 오신날']부산 청사포에 자리잡은 해월정사


- 성철스님이 말년에 수행 했던 절…바다 앞 풍광 빼어나
- 달력뒤·헌노트에 적힌 법문등 체취도 오롯이 간직한 곳


부산 와우산 기슭의 풍경 좋기로 소문난 달맞이 고개를 넘어가다보면 청사포가 보인다. 청사는 말 그대로 푸른 뱀이다. 옛날 이 마을에 금실 좋은 부부가 살았는데 고기잡이 나간 남편이 바다에 빠져죽자 아내는 해안가 바위에서 하냥 남편만을 그리워했다.



▲해월정사 전경▲해월정사 전경


이 모습을 바다에서 본 용왕은 측은한 마음이 들어 푸른 뱀을 보내 부인을 용궁으로 데리고 와 죽은 남편과 해후하게 했다는 예쁜 전설이 숨어 있다. 청사는 또한 모래 사자를 써서 푸른 모래 포구라는 이름으로 불리기도 한다.

지명이 예뻐서 일까 청사포 일대는 예전부터 숨겨진 명승지였다. 바다는 맑고 깨끗했다. 해월 정사(주지 일륜)는 바다의 얼굴이 고개를 내미는 틈에 오롯하게 세워져 있다. 해월정사는 한국 불교의 큰 스님인 성철스님이 말년에 머물며 수행했던 절이다. 성철 스님이야 거칠 것 없는 자유인이었지만 이곳 해월정사의 풍광만은 가슴속에 담고 계셨는지도 모를 일이다.



▲봉훈관 ▲봉훈관
해월정사는 성철 스님의 맏상좌였으며 지금은 회주로 있는 천제스님이 성철스님을 모시기 위해 창건한 절이다. 정사라는 것이 본시 석가모니 부처님 시절부터 우기 때 안거하면서 머무르도록 지어놓은 것을 일컫으니 바다의 달처럼 묵묵하게 정진했던 스님의 모습과도 얼추 맞아 떨어진다.

4층 높이로 되어 있는 절의 풍경은 과하지도 그렇다고 지나치게 부박하지도 않다. 대부분의 사찰과 달리 일주문에는 한글로 정성스럽게 쓴 '해월정사' 현판이 붙어 있어 이채로운 느낌을 준다.

사찰 내부로 들어서면 관음전과 와우산방, 해월전과 적광전을 비롯해 2007년 개원한 봉훈관이 옹기종기 모여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담백한 수묵화로 온통 벽면을 채운 벽화다. 전통적인 사찰에는 대개 탱화가 그려져 있는데 이곳만은 바다의 모습을 담았다.


▲해월정사 벽화 ▲해월정사 벽화
근육질의 남성처럼 험산이 있고 산의 중턱에는 사찰로 보이는 건물이 보인다. 먼 바다를 품었던 고기잡이배들은 종종대며 귀향을 하고 있다. 왜 수묵화를 담아놓았느냐고 묻지는 않았다. 어쩌면 그것은 평생 수묵처럼 담백하게 살았던 성철스님의 삶을 투영시켜 놓은 것인지도 모를 일이다.

해월정사를 보면 성철스님이 보인다. 해월정사가 단지 성철 스님의 말년 삶을 담고 있어서만은 아니다. 정사의 곳곳에 스님의 손길과 숨결이 느껴지기 때문이다. 청정수행 했던 '한국 불교의 스승' '한국 현대사의 지남(指南)'인 성철 스님의 봉훈관이 있는 곳도 바로 이곳이다.



▲시월전의 내부 ▲시월전의 내부
봉훈관은 성철스님의 기념관 격이다. 그이가 평시에 남겨놓은 흔적들은 지극도 묵언처럼 빛이 난다. 봉훈관 3층 성철 스님의 친필이 모셔진 유물관은 '시월전(示月殿)'이라 이름 붙여졌다. 달을 보여준다는 뜻이다.

성철스님이 대중을 이끈 모습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거침이 없던 평소 성격처럼 스님은 달력 뒷면에도 글을 남겼고, 헌 노트에도 법문을 정리했다. 선이 굵은 분이면서도 스님은 또한 꼼꼼하고 정확한 분이었다. 달필로 메모해놓은 법문원고나 노트를 보면 육필원고 자체를 책으로 펴내도 될 만큼 수려하다.

그렇게 모아진 120여 점의 유물들을 찬찬히 살피노라면 스님의 체취가 느껴지는 것처럼 살가운 감정이 인다. 물론 뜻을 해석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해서체의 일필휘지인데다 깊은 속뜻을 담고 있어서 자구 하나 조차 가늠하기 어렵다.



▲봉암사 결사의 내용을 담은 방명록과 규약집▲봉암사 결사의 내용을 담은 방명록과 규약집
봉훈관에서 가장 중심에 있는 것은 불교계의 역사적 사건이었던 1947년 봉암사 결사를 담은 공주규약(共住規約)이다. 당시 불교는 일제 강점기의 후유증으로 왜색불교의 영향이 남아 있던 시절이었다. 젊은 스님들은 한국 불교의 혁신을 주장하며 '부처님 가르침대로'살겠다는 굳은 결의를 했다.

현재는 열반하시거나 한국 불교의 큰 스님이 되신 청담 월산 자운 성수 법전 스님 등이 결사에 참여 했다. 후일 결사에 참여했던 스님 중에 최고의 정신적인 지도자인 종정이 3분, 불교행정의 수반인 총무원장이 5분 불교계의 상원의장격인 원로의장이 4분이나 나왔다. 공주규약은 같이 도를 수행하는 스님들이 공동생활에서 지켜야 할 수칙을 제시한 것이다.

규약의 내용은 엄중했다. 어떤 사상과 제도를 막론하고 부처님과 조사의 가르침 이외의 개인적인 의견은 배제한다./매일 2시간 이상의 노동을 한다./필요한 시간이외에 누워 자는 일은 허용되지 않는다/사찰을 벗어날 때는 삿갓을 쓰고 죽장을 짚으며 반드시 함께 다닌다./공양은 정오가 넘으면 할 수 없으며 아침은 죽으로 한다 등 모두 18개 항목이었다.



규약을 어기면 어김없이 쫓겨났다. 절에 남아 있던 탱화도 부처님과 그 제자를 담은 것을 빼곤 싹 뜯어냈다. 이때 세운 엄정하면서도 오직 부처님의 깨달음만을 향한 지순한 계율이 조계종의 전통 속에 고스란히 스며들었다.

공주규약의 주도적인 역할을 했던 성철스님은 법을 행하는데 있어서는 호랑이였다. 대중이 앉아서 졸거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면 몽둥이로 내리치며 "밥 값 내 놓거라 이놈들아"하며 불호령을 내렸다. 그렇다고 해서 모든 것을 법대로 하는 원리주의자는 아니었다. 투박하면서도 속 깊은 정과 어린아이처럼 순수한 마음을 가진 진인이었다.

"큰스님 말씀 듣던 밤바다, 달을 품었네"
성철 스님의 유지를 받들기 위해 해월정사는 추모전과 사리탑 그리고 공덕비를 차례로 세울 예정이다. 회주인 천제스님의 말씀처럼 "평생 부처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노력했던 성철 스님의 가르침을 친견하고 받들어 되새기고자 하는 마음"에서 시작된 법사이다.



청정가풍의 수행정신을 널리 펼친 성철스님의 간결하면서도 박력 있는 말씀이 그리운 것은 정신적인 지도자가 없이 부표처럼 떠도는 한국 사회의 척박한 현실 때문인지도 모른다.

해월정사를 나서는 순간 시원한 바닷바람이 불었다. 성철스님의 은은한 미소처럼 부드러운 바람 그 속에 고운 향내가 묻어 나비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추모 성역 조성 참여 문의 051)703-9641~2

성철스님의 맏상제였던 해월정사 회주 천제스님
"성철 스님은 자신에 엄하고 대단히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회주 천제 스님 ▲회주 천제 스님
그 스승의 그 제자. 천제 스님의 말씀과 인상에는 왠지 성철스님의 기풍이 묻어 있는 듯하다. 성철 스님에 비해 인상도 부드럽고 말씀 또한 사분한데도 성철스님의 모습이 닮아 있는 것은 평생 스승의 가르침을 되새기며 진리를 추구하는 도반이자 제자로 살았기 때문일 것이다.



"은사이신 성철 스님은 한국불교 중흥의 주역이자 모든 수행자의 귀감이셨습니다. 스스로 부처님 가르침이 아닌 언행은 털끝만큼도 보이지 않으셨습니다. 저희 상좌들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스승의 말씀을 잘 지키고 행하여 그 가르침을 널리 전해야 합니다. 못난 상좌가 되지 않기 위해 열심히 노력해 왔지만 오직 부끄러운 마음뿐입니다."

부끄러운 마음뿐이라지만 천제스님은 해인사에서 득도 한 이후 조계종의 법규위원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해온 존경받는 인물이다. 천제스님의 지남은 성철스님이었다. 천제 스님이 기억하는 성철스님은 자신에게는 대단히 엄하고 또한 대단히 인간적인 사람이었다.

"성철 스님의 십년 시봉을 했음에도 스님이 평생 상좌를 두지 않기로 했으니 다른 스님을 은사로 정하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중 안 되고 평생 살겠습니다. 라고 하니 그제서야 천제라는 이름을 주시고 상좌로 받아 주셨습니다."



천제란 중생의 업이 다하기 전에는 부처가 되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래서 일까? 천제 스님은 자신의 일보다 스승의 가르침을 전하고 불법을 펼치는 일 외에는 다른 관심이 없다. 경학은 물론 한문에 산스크리트어 일본어 타임지를 주간지 읽듯 하는 영어 실력까지 갖춘 보기 드문 학승이자 선승임에도 스승 속에 자신을 낮추는 이이다.

"어떤 이는 무소유를 주장했지만 성철스님은 무소주를 주장했습니다. 머무르지 마라 집착하지 마라고 늘 말씀하셨습니다. 모든 수행자들의 귀감이 되었던 성철 스님의 부촉을 되새기고자 친필을 소개했습니다. 지난 1천년동안은 해인사가 대표사찰이었지만 세계를 향한 국제화 시대에는 해월정사가 더 큰 의미가 있을 겁니다. 지난해 기념관을 짓고 추모전을 짓고 나아가 사리탑까지 세우는 것은 해월정사가 명실상부한 중심도량으로 승격시켜 부처님의 오롯한 말씀을 전하고자 함입니다."

스님은 성철 스님을 닮은 미소를 담고 하늘을 보았다. 부처님 오신날을 며칠 앞둔 하늘은 유난히도 파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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