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그룹, 현대건설 인수 '빨간불'

머니위크 지영호 기자 2010.05.26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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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

현대그룹이 경영사정 악화로 적통성의 상징인 현대건설 (32,200원 0.00%) 인수에 빨간불이 켜졌다. 최근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이 현대그룹을 재무구조개선 약정 대상으로 삼았기 때문이다.

현대그룹 주채권은행인 외환은행과 채권금액 상위 은행인 산업은행, 신한은행, 농협은 5월 말까지 현대그룹의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기로 17일 결의했다.



재무구조개선약정을 체결하면 기업은 부채비율을 축소하고 때에 따라서 계열사 정리, 자산매각, 유상증자, 구조조정 등 자구 노력을 해야 한다. 각종 사업추진도 채권단의 제약을 받게 된다. 현대그룹의 현대건설 인수가 사실상 불가능할 것으로 관측되는 이유다.

현재 시장에 알려진 현대건설의 인수가격은 4조5000억원선. 반면 금융감독원 자료를 토대로 한 현대그룹 주력 4개사(현대상선 (19,900원 ▼70 -0.35%), 현대엘리베이터, 현대아산, 현대로지엠)의 현금성 자산은 1조1000억원에 그치고 있다.



현대그룹은 채권단의 재무구조개선약정 추진에 즉각 반발하고 나섰다. 주력인 현대상선이 글로벌 금융위기에도 불구하고 지난해 손실을 최소화했고, 올해 1분기에는 흑자전환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재무구조개선약정은 가혹하다는 것. 차라리 "주거래은행을 변경하겠다"고 나설 정도다.

현대그룹 관계자는 “주거래은행 등이 지난해 재무제표 기준으로 약정 기준을 판단하다 보니 올해 급격한 회복세를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다”면서 “해운시장의 특성상 선박 매입 시 발생하는 차입구조를 이해하지 못한 처사”라고 성토했다. 약정 체결이 된 지난해 기준 현대상선의 실적은 매출 6조9386억원, 영업손실 5764억원, 순손실 8376억원이었다. 부채는 6조6470억원, 부채비율은 연결 기준 284%다.

한편 금융권 및 해운업계는 지난해 11월 한진해운의 재무구조개선약정에 주목하고 있다. 한진해운은 약정 체결을 앞두고 캠코에 선박펀드로 16척의 선박을 매각하고, 컨테이너 장비와 ABS(해외자산유동화증권) 및 ABL(자산유동화대출)을 통해 7600억원의 자금조달을 진행한 바 있다. 또 약정 체결 이후 신항만 지분을 2000억원에 매각하고, 2500억원의 유상증자 결정으로 재무구조 개선에 총력을 기울였다.

인수 실패는 곧 그룹 와해


현정은 현대그룹 회장은 취임 이후 해마다 현대건설 인수를 ‘올해의 목표’로 삼았다. 올해 신년사에서도 변함없이 "그룹의 미래를 위해 현대건설 인수를 포기할 수 없다"고 의지를 다졌다.

현대건설은 그룹의 모태이자 상징인 회사다. 쌀가게와 자동차 정비소를 운영하던 고 정주영 명예회장이 건설업자의 공사비를 보고 나서 시작한 것이 현대건설의 시초다.

1947년 현대토건이라는 이름으로 시작해 1950년 현대건설로 이름을 바꾼 뒤 소양강댐 등 국내 굴지의 건설사업을 주도하는 등 전쟁 후 각종 기반시설 복구사업으로 승승장구해 10년만에 건설업계 1위에 오르며 그룹의 근간을 이뤘다.

현대건설은 1997년 외환위기와 2000년 왕자의 난을 겪으면서 2001년 계열분리 돼 채권단의 공동관리를 받는 수모를 겪다가 2006년 워크아웃을 졸업했다. 현재 현대건설은 시공순위 1위에 복귀하며 과거 영광을 재현하고 있다.

현대건설은 특히 현정은 회장에게 상징적인 의미가 있는 기업이다. 고 정주영 명예회장과 고 정몽헌 회장으로 이어지는 그룹의 적통성을 계승하는 문제가 있기 때문이다.

현 회장이 현대건설 인수에 사활을 거는 이유는 또 하나 있다. 바로 그룹의 존립이다. 현재 현대그룹은 매출의 60% 이상을 현대상선에 의존하고 있다. 금융계열사인 현대증권을 제외하면 영업실적의 78.6%를 현대상선이 차지한다. 현대상선 자산은 그룹의 80%가 넘는다.

그룹의 중핵인 현대상선이지만 소유권은 불안정하다. 현정은 회장 우호지분인 현대엘리베이터가 22.0%를 소유하고 있는 등 우호지분이 40%가량 된다. 반면 정몽준 한나라당 대표가 최대주주로 있는 현대중공업이 17.60%를, 또 현대중공업의 자회사인 현대삼호중공업이 7.87%를, ‘시숙부의 난’을 주도한 정상영 명예회장의 KCC가 4.91%를 소유하고 있다.

현대건설이 소유하고 있는 8.30%의 현대상선 지분이 캐스팅보드 역할을 하는 셈이다. 현대건설이 현대그룹을 배제한 범현대가의 손에 넘어갈 경우 현대상선의 경영권도 장담할 수 없게 된다. 현대상선이 흔들리면 현대그룹 전체가 와해될 수 있다. 현대그룹이 현대건설 인수에 사활을 걸고 있는 이유다.

정상영-정몽준 조합 살아날까

한국정책금융공사 측은 5월19일 "6월 중 현대건설 매각작업을 시작할 것"이라며 "보통 매각 작업이 6~7개월 걸리는 점을 감안하면 내년 초께 주인이 결정될 것으로 본다"고 밝혔다.

그런데 현대그룹은 채권은행이 재무구조 약정 체결을 결의함에 따라 더 이상 현대건설 인수에 올인하기 어려운 상황이 됐다.

이것이 다른 현대가에게는 절호의 기회다. 정주영 명예회장의 적통성을 잇기 위해서는 그룹을 다시 가져오는 것이 최선이다. 2003년 정상영 명예회장의 시숙부의 난과 2006년 정몽준 현대중공업 최대주주의 시동생의 난은 현대가의 그룹 경영권 확보를 위한 흔적이다.

특히 현대중공업 (156,700원 ▼500 -0.32%)은 현대 간판을 단 기업을 하나씩 품안에 넣고 있는 것을 볼 때, 다음 수순은 현대건설일 가능성이 높다는 관측이다. 문제는 M&A 실탄. 현대중공업은 선박건조대금과 현대오일뱅크 잔여지분 인수 등으로 올해에만 최대 7조원가량의 비용이 들 예정이다. 이에 비해 현재 현대중공업의 현금성자산은 1조원 이하다.

현대중공업이 아니라면 KCC (307,000원 ▲8,500 +2.85%)의 정상영 회장 주도의 인수도 거론되고 있다. 범현대가에서 정 회장에 힘을 실어주는 그림이다. 정 의원과 작은아버지인 정상영 회장의 조합은 최근 현대종합상사 인수전으로 또 한차례 손발을 맞춘 바 있다. 이미 현대그룹 경영권 문제로 현 회장과 전쟁을 벌인 바 있는 정몽준-정상영 조합이 현대그룹의 위기에 어떻게 움직일지 관심이 가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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