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퇴 후 1년, '삼식이'라도 좋으니 노세요

머니위크 이정흔 기자 2010.05.10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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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머니위크]연중기획/ 베이비부머 제2의 인생을 쏘다

“은퇴하면 1년은 그냥 노세요.”

전문가들이 조언한다. 이럴 때 반응은 결국 하나로 모아진다. “참 팔자 편한 소리 하시네.”

맞다. 참 팔자 편한 소리가 아닐 수 없다. 은퇴와 동시에 ‘안정적인 수입원’부터 사라지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다. 그러니 당장 먹고 살 돈도 없는데 아무리 간 큰(?) 남편이라한들 1년을 가만히 놀고 먹을 수만은 없는 노릇이다.



그런데도 전문가들은 “은퇴 후 1년의 휴식은 꼭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니, 은퇴하고 1년을 쉬는 것이 그만큼 어렵기 때문에 이 ‘1년간의 휴식’을 더욱 강조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삼식이’ 남편을 ‘무식이’로 내몰면 안 되는 이유



“너네 남편 삼식이 됐다며?”
마누라의 얼굴에 씁쓸한 미소가 번진다.
“그래, 너네 남편은 아직 ‘무식이’라 좋겠다.”
되받아치는 마누라의 목소리가 앙칼지다.

베이비붐 세대의 은퇴시기와 맞물려 요즘에는 TV속 드라마만 틀어도 이 같은 상황이 자주 등장하곤 한다. 그런데 삼식이? 무식이? 삼식이는 집에서 삼시 세끼를 모두 챙겨먹는 남편을 뜻하는 우스갯소리다. 무식이는 반대로 집에서 밥을 한끼도 안 먹는, 50대 가정주부에게는 말하자면 꿈의 남편(?)인 셈이다.

그러나 이 상황이 더욱 서러운 건 남편이다. 큰 소리치며 내밀던 ‘월급 봉투’가 사라지는 순간 스스로의 존재감도 같이 사라져 버린 것만 같다. 시간이 갈수록 아내의 잔소리와 눈치는 자꾸만 더해져 가는데, 정작 외출할 곳조차 없다는 게 한심하기만 하다. 취업이든 창업이든 하루빨리 새로운 일을 시작해서 다시 나의 모습을 찾아야겠다는 마음만 앞선다.


김갑용 이타창업연구 소장은 “은퇴 후 1년을 쉬는 과정 역시 취업이나 창업을 위한 준비로 생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대부분의 은퇴자들은 은퇴 전까지 30년을 비슷한 직종, 같은 분위기 내에서 일해 온 사람들이다. 특히나 한 직장에 오래 머문 이들일수록 자신도 모르게 그 조직의 분위기나 일하는 방식, 혹은 사고방식까지 몸에 배 있을 수 밖에 없다.

그러니 은퇴 후 1년은 그 동안 내 몸에 뿌리박혀 고착화 돼 있는 습관을 벗어버리는 시간이다.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는 이 기간을 거치지 않고서는 새로운 일에 뛰어들어도 실패를 반복하기 십상이다.

김 소장은 “은퇴 후 어떤 일을 시작하더라도 실패의 가장 큰 이유는 ‘조급증’이다”며 “섣불리 뛰어들어 실패를 거듭하기 보다는, 1년의 시간을 ‘투자한다’는 생각으로 조급증을 극복해 나가는 훈련이 필요하다”고 당부했다.

◆특별한 이벤트를 찾지 말고 ‘그냥’ 놀아라

1주일에 168시간. 은퇴하자마자 너무나 많은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자다가 일어나서 밥 먹고, TV 앞에서 리모콘 돌리는 것도 하루 이틀. 도대체 저 많은 시간을 무엇을 하면서 보내야 할지 막막하기만 하다.

스트레스 및 여가활동 전문 컨설턴트 업체인 SL컨설팅의 홍성아 수석컨설턴트는 “은퇴 후에는 무작정 노는 것보다는, 규칙을 세워 노는 것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는 달력을 먼저 그려볼 것을 제안한다. 단위는 1주일도 좋고, 한 달도 좋다. 하루 스케줄을 앞에 놓고 하나하나씩 빈 칸을 채워나간다. 잠자는 시간, 밥 먹는 시간이 먼저 채워질 테고, 그 다음엔 신문을 읽는다거나 TV를 본다는 등의 시간이 채워진다. 그러나 여전히 감당하지 못할 정도의 많은 빈칸이 남아있다면, 새로운 여가활동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그는 “여가활동이라고 하면 보통 특별한 이벤트를 떠올리는데 그게 아니라 일상에서 내가 즐거워하는 모든 것이 여가활동”이라고 정의한다. 어느 퇴직 교장은 하루에 꼭 한번은 아파트 앞에 핀 꽃이 너무 예뻐 가만히 그 꽃을 바라보곤 한다. 신문을 읽는 것도 마찬가지고, 창업박람회를 둘러보는 것도 여가활동의 하나다. 그저 내가 재미있게 놀 수 있는 것이면 충분하다.

이때 조금 더 나를 알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것이 ‘과거 여행’이다. 홍 컨설턴트는 “대부분은 30년이란 긴 세월을 먹고 살기 위해 자신을 억누르는 데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자신이 무엇을 진짜로 좋아하는지 알지 못한다”고 지적한다. 때문에 과거의 자신을 떠올려보며 스스로 ‘진짜 내 모습’을 찾아봐야 한다는 얘기다.

◆혼자 놀기보다 ‘함께 놀기’

‘도전해 보고 싶은 무언가’가 떠올랐다면 그대로 놀면 된다. 다만 ‘혼자 놀기'보다는 ‘함께 노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는 것이 전문가들의 조언.

홍성아 수석컨설턴트는 “엘리트층일수록 자신이 좋아하는 놀이를 찾아가다 보면 ‘공부’나 ‘화초가꾸기’ 등 혼자서 놀기를 즐겨 하는 경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은퇴 후의 삶에 있어서는 나와 함께 공감해 줄 사람, ‘인맥 네트워킹’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지금까지 만나왔던 사람들 외에 1년 간의 휴식을 통해 새로운 인맥을 쌓는 것이 필요한 것은 그 때문이다.

홍 컨설턴트는 “특히 엘리트층은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이나 정보를 다른 사람에게 알려주는 것을 좋아한다"며 "오히려 혼자서 즐기는 여가활동보다 더 큰 만족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한다.

최근에는 의지만 있다면 밖에 나가 새로운 여가활동을 배울 수 있는 곳도 많다. 각 구마다 마련된 노인종합사회복지관이 대표적. 나들이 삼아 가볍게 방문해서 갖가지 수업을 기웃기웃해보고, 마음에 드는 수업이 있을 땐 그 반의 반장에게 이것저것 물어가며 정보를 수집하는 것 자체가 놀이가 될 수 있다.

각 구청사이트에 들어가면 저렴한 가격에 다양한 강좌를 들을 수 있는 ‘동주민센터’도 추천할 만하다. 자격증 코스를 생각한다면 문화원도 괜찮고, 20만원 이상으로 수업료가 비싸긴 하지만 대학교 평생교육원 또한 젊은 열기를 느낄 수 있어 아주 좋다. 자격증 반은 없지만 다양한 취미 생활을 즐기기에는 백화점 문화센터도 모자람이 없다.

◆나만의 ‘명함’으로 존재감 확인

물론 이 과정에서 재미있을 줄 알고 도전한 분야가 재미가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걱정할 건 없다. 1년의 여유가 필요한 건 ‘충분히 시행착오’를 거치기 위함이다. 해보지 않고 지레 결정하는 것 보다는 일단 도전해 본 뒤에 판단하는 것이 더 낫다.

다양한 외부 활동을 통해 어느 정도 새로운 분야에 자신감이 생겼다면 ‘명함’을 파는 것도 좋다. 마술을 배워 자원봉사활동을 다니는 한 퇴직공무원은 명함 뒤에 일러스트레이션까지 박아가며 자신을 홍보한다. 20년간 주말 농장을 운영하다 원예상담사로 활동하길 원하는 퇴직자는 명함에 “주말농장&원예상담”이라고 자신만의 직업을 새로 만들어 넣은 경우도 있다고 한다.

홍 컨설턴트는 “어느 직함, 어느 조직에 속해야만 명함이 필요한 건 아니다. 내가 어떤 것을 좋아하는 사람인지, 어떤 일을 잘할 수 있는지를 표현하는 측면에서 명함이 중요하다”며 “1년 동안 조급함을 가라앉히고 내 자신의 존재감을 확인하는 데도 명함이 큰 도움이 된다”고 조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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