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 뭉칫 돈 고객이 반갑지 않다고?

머니투데이 김익태 기자, 오상헌 기자, 도병욱 기자 2010.03.26 07: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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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금은 느는데 대출은 줄고..은행 돈 굴릴 곳 없어 '골머리'

# 서울에서 조그만 사업체를 운영하는 A씨는 최근 여유자금을 맡기기 위해 한 은행 지점을 방문했다 황당한 경험을 했다. 여느 때라면 친절하게 금리 수준을 설명해주고 예금유치를 위해 적극적으로 응대해야 할 은행 직원의 태도가 평소와는 달랐다. 상담직원은 사무적인 어조로 "예금금리가 많이 낮아졌으니 금리가 더 높은 은행을 찾거나 여유자금을 다른 곳에서 굴리는 게 어떻겠느냐"고 건성건성 말했다.

# 25일 오전 8시 A은행 본점 앞. 출근 시간에 바삐 걸음을 재촉하는 A은행 직원들에게 대출 모집인들이 전단지 한 장씩을 나눠줬다. 경쟁은행인 B은행에서 은행원들을 대상으로 판매하는 신용대출 소개서였다. 'A은행 임직원을 위한 특별한 대출'이란 설명과 함께 무보증, 무담보 대출 금리와 상환방식이 자세히 적혀 있었다.



은행권에 예금을 기피하는 새로운 풍속도가 생겼다. 연초 고금리 특판 예금으로 저마다 수신기반 확충에 '올인'했던 모습과는 영 딴 판이다. 반면 대출을 늘리기 위한 '영업전쟁'은 갈수록 치열해지고 있다. 저금리 기조가 유지되면서 시중자금의 예금 '쏠림현상'이 가속화되고 있는 데 비해 대출은 잔뜩 움츠러든 탓이다.

25일 은행권에 따르면 국민·우리·신한·기업·하나 등 자산규모 상위 5개 은행의 지난 2월 말 기준 정기예금 잔액은 299조3225억원. 작년 말보다 29조9455억 원(11.1%)이나 증가했다.



이와 달리 원화대출금 잔액은 520조7908억 원으로 올 들어 오히려 3118억 원 줄었다. 특히 부동산 시장 침체와 서민들의 자금난으로 인해 같은 기간 가계대출 잔액이 256조3047억 원으로 1조2072억 원 감소했다.

이에 따라 각 은행 자금시장본부엔 비상이 걸렸다. 높은 금리로 유치한 자금은 넘쳐나는데 마땅히 돈을 빌려줄 만한 곳이 없어서다. 계속되는 시중금리 하락세에 맞춰 은행들은 예금금리를 연초보다 평균 1%포인트 가량 내렸다. 그런데도 예금 증가세는 꺾일 기미가 없다.

은행들은 수익성 악화를 만회하기 위해 대출 확대에 '총력전'을 펴고 있지만 여의치 않은 실정이다. 가계대출을 주도했던 주택담보대출이 부동산 가격 급락과 함께 줄고 있고, 기업 대출 수요도 큰 폭으로 감소하고 있다. 고객 돈을 받아 이자를 받고 대출을 해줘 이익을 남기는 게 은행이다. 그런데 돈 굴릴 곳이 마땅치 않다보니 뭉칫돈을 들고 오는 고객이 골치 거리로 전락해버렸다.


한 시중은행 자금담당 임원은 "지금 같은 상황이라면 솔직히 예금 고객이 반갑지 않을 정도"라며 "대기업은 돈을 쌓아두고 있어 대출이 필요 없고, 자금난을 겪고 있는 중소기업엔 연체 관리나 건전성 측면에서 쉽게 돈을 빌려줄 수 없는 상황"이라고 토로했다.

난감한 처지에 놓인 은행들은 신용대출 영업을 대폭 강화하고 있다. 통상 은행들은 대출모집인을 통해 주택담보대출 고객들을 끌어 모은다. 그런데 최근에는 신용대출을 확대하는 것에도 대출모집인을 동원하고 있다. 상대적으로 규모가 작은 은행들이 더욱 열을 올리고 있다. 요새 직장인 치고 한번 쯤 휴대폰이나 문자로 신용대출 권유를 안받아본 경우가 드물 정도다.

다른 은행 자금시장본부 부행장은 "고금리 특판 예금이 부메랑이 돼 수익성이 악화될 우려가 커지고 있다"며 "돈 굴릴 데가 마땅치 않은 은행들이 앞 다퉈 국고채 투자 등 채권시장에 뛰어들고 있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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