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포]파산 앞둔 전일저축銀, 지금 무슨 일이…

전주=정진우 기자 2010.03.14 17: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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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00만원 이상 고객 3573명 정부 규탄..당국 "다른 저축銀도 문제"

↑ 전북 전주시 태평동 전일저축은행 내부 모습.↑ 전북 전주시 태평동 전일저축은행 내부 모습.


# 지난 11일 오후 전북 전주시 태평동 중앙시장 내 전일저축은행 1층 영업장. 정문은 굳게 닫힌 채 영업점 내부엔 붉은 글씨로 '원금보장', '금융당국 책임져라' 등의 문구가 적힌 큰 종이들이 여기저기 붙어있다.

영업점 내부엔 30여 명의 사람들이 삼삼오오 짝을 지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이야기를 나누고, 창구에선 '가지급금 지급'이란 푯말을 걸어놓고 찾아오는 고객들에게 서류를 받고 있다.



거동이 불편한 70대 노인이 부축을 받으며 힘겹게 창구 앞에 앉았다. 창구직원 설명대로 관련 서류를 작성한 지 10분 남짓, 다시 몸을 일으켜 밖으로 향했다. 그는 "먹고 살려고 그동안 모아둔 8000만 원을 저축했는데 못 받게 생겼어"라며 "기자 양반이 좀 도와줘"라고 말했다.

영업점 한쪽에는 대책위원들이 있다. 이들은 한숨을 내쉬며 "여기서 이러고 있은 지 두 달이 됐는데 별 수가 없네요. 청와대, 국무총리실, 권익위에다 탄원서를 내봤지만 그쪽에선 암시롱도 안혀요(아무런 도움을 주지 않고 있어요)"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 전일저축은행 외부 모습. 외벽에 '원금보장'을 요구하는 고객들의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전일저축은행 외부 모습. 외벽에 '원금보장'을 요구하는 고객들의 플래카드가 걸려있다.
◇전일저축은행 사태 70일=전일저축은행은 지난해 마지막 날 문을 닫았다. 전북 도민의 사랑을 받으며 30년 넘게 영업을 해온 이 은행은 3년 전만해도 자산 1조원을 돌파했다며 떵떵거렸다.



현재 이 은행의 예금자는 모두 6만3722명. 이 중 3573명이 5000만 원 이상 거래하고 있다. 예금자보호법에 의해 5000만 원 이하 고객은 실질적으로 피해를 입지 않지만, 3573명은 돈을 떼이게 된 상황이다. 피해액만 688억 원.

지난 1월부터 예금보험공사 직원들이 파견 나와 있다. 일단 1000만 원 정도를 예금자들에게 가지지급금으로 내주고 있다. 다음 달 파산절차를 위한 가교은행이 설립되면 5000만 원 이하 고객들은 나머지 돈을 돌려받게 된다.

문제는 그 이상 투자한 3573명의 고객들. 이들은 은행이 무조건 원금보장을 해줘야 한다는 입장이다. 대부분 먹고살기에 바쁜 자영업자들에다 노인들이 많아 예금자보호 한도 같은 내용을 잘 몰랐다는 것이다. 또 은행에서 5000만 원 이상 투자한 사람들의 경우 은행 부실로 나중에 피해를 입을 수 있다는 설명을 하지 않았다고 주장하고 있다.


2008년에 7000만 원을 3년만기 예금에 가입한 김경숙(54세, 가명)씨는 "애초에 은행에서 5000만 원까지 보호가 된다는 말을 안했다"며 "무조건 금리를 높게 준다는 이야기에 속아서 넘어갔다"고 울분을 터뜨렸다. 현재 이 은행 예금(1년 만기 기준)은 시중은행보다 1∼1.5%포인트 금리가 높다.

하지만 은행 측 설명은 다르다. 직원들은 분명히 예금을 받을 때 예금자보호법에 대한 설명을 하고 있다는 것. 한 직원은 "고객들이 거래를 할 때 분명히 설명을 하고 있다"며 "통장에도 분명히 관련 사항이 적혀있다"고 강조한다.
↑ 전일저축은행 정문은 굳게 닫혀있고 피해자들의 요구사항이 적힌 내용이 걸려있다.↑ 전일저축은행 정문은 굳게 닫혀있고 피해자들의 요구사항이 적힌 내용이 걸려있다.
◇"이재오도 해결 못하는 일"= 이재오 국가권익위원장은 지난 1월 말 전북 김제를 방문했다. 이 자리에서 전일저축은행 피해자들과 만났다. 피해자들은 억울함을 호소했고 이재오 위원장은 눈시울을 붉혔다. 대책을 고민해보겠다고 떠난 이재오의 한마디에 피해자들은 희망을 걸었다. 하지만 한 달이 훌쩍 지나도 감감 무소식. 한 피해자는 "이재오도 해결하지 못하는 일이 있구먼…"이라며 혀를 찼다.

현재 5000만 원 이상 투자한 피해자들이 구제받을 방법은 현실적으로 없다. 예금자보호법 탓이다. 다만 다른 업체가 전일저축은행을 인수할 경우 상황은 달라진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다. 이 은행을 인수하려면 4500억 원 이상이 필요한데, 거금을 내고 사려는 곳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 이 은행은 현재 파산절차를 준비 중이다. 지난 2월28일까지 정상화 작업이 펼쳐졌지만 별로 달라진 게 없었다. 예보는 곧 가교은행을 설립해 파산 작업을 마무리할 예정이다.

피해자들은 정부가 나서서 무조건 원금을 보장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은행의 부실을 정부가 알고도 눈감고 있었다는 이유에서다. 2003년부터 2007년까지 대출 한도액이 80억원이었는데 500억 원 넘게 대출이 나갔고, BIS비율 문제로 2008년 경영개선지도 요구를 받았는데도 이 같은 사실을 공고하지 않았다고 강조한다. 게다가 2004년부터 계속 프로젝트 파이낸스(PF) 방식으로 돌려막기를 해왔는데 이에 대한 관리감독이 소홀했다는 것이다.

이에 정부 관계자는 "그동안 저축은행에 대한 관리 감독은 제대로 이뤄졌고, 전일저축은행은 은행 내부 문제로 부실이 생겨 발생한 문제"라며 "5000만 원 이상 투자할 시에는 투자자들의 주의가 필요했다"고 강조했다.
↑ 창구에선 피해자들에게 가지급금을 지급하기 위한 서류를 받고 있다.↑ 창구에선 피해자들에게 가지급금을 지급하기 위한 서류를 받고 있다.
◇진짜 문제는 지금부터=정부는 1997년 외환위기 이후 100여 개의 저축은행이 쓰러지면서, 문제점이 계속 외부에 드러났는데도 이처럼 피해자가 발생하는 것에 아쉬움을 나타냈다.

정부 관계자는 "지난해에만 10개에 해당하는 저축은행이 문을 닫았다"며 "예금자보호가 적용되지 않는 사례를 수차례 강조했지만 이번에도 역시 피해자가 속출해 답답하기만 하다"고 말했다.

문제는 전일저축은행에만 그치지 않는다는 점이다. 지금도 수많은 저축은행들이 본업보다 PF대출 규모가 많아 언제 터질지 모르는 뇌관으로 남아 있다. 이 관계자는 "저축은행 부실 문제는 이제 부터가 시작"이라며 "앞으로 철저한 관리 감독으로 피해를 최소화할 방침"이라고 밝혔다. 전일저축은행의 해법은 없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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