골목길 걷다보면 과거로 돌아간 듯

민병준 여행작가 2010.02.07 10:24
글자크기

[머니위크]민병준의 길 따라 멋 따라/ 충남 강경

금강 하구에 자리 잡은 강경은 조선시대는 물론이요 일제강점기까지만 해도 대구, 평양과 함께 우리나라 3대 시장으로 꼽히던 큰 고을이었다. 육로와 수로의 장삿길이 이어지는 요지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철도가 발달하면서 퇴락하기 시작해 이젠 시간이 멈춘 듯 한적한 시골의 모습으로 머물러 있다.
image
조선 최고의 인문지리학자인 이중환(1690~1756)이 활동하던 18세기에도 강경은 제법 번창했던가보다. 그는 저서 <택리지> '생리' 편에서 배를 이용한 교역의 장점을 풀어나가다가 강경을 이렇게 설명하고 있다.

은진의 강경은 충청도와 전라도의 육지와 바다 사이에 자리 잡아, 금강 남쪽 들 가운데에서 하나의 큰 도회를 이룬다. 바닷가 사람과 산골 사람들이 모두 여기서 물건을 사고판다. 언제나 봄과 여름 사이에 생선을 잡고 해초를 뜯는데, 이때에는 비린내가 마을을 뒤덮고 큰 배와 작은 배가 두갈래로 갈라진 항구에 담처럼 밤낮으로 늘어서 있다. 한달에 여섯번씩 열리는 큰 장에는 먼 곳과 가까운 곳의 물화가 모여 쌓인다.



철도가 놓이면서 쇠퇴하기 시작한 강경

이중환은 금강이 내려다보이는 강경 팔괘정에서 <택리지>를 썼으니 매우 정확한 설명일 것이다. 그의 표현대로 강경 포구엔 성어기인 3월부터 6월까지 넉달 동안이면 하루 100척이 넘는 배들이 드나들었다. 그리하여 1920년대 이미 전기 수도시설이 갖춰졌고 극장도 있었다. 당연히 은행 경찰 법원 극장 등도 앞 다투어 들어섰다. 당시엔 지금 광역시로 커진 대도시 대전은 물론 금강 주변의 부여 공주 군산, 좀 더 떨어진 익산 청주 등도 대부분 강경의 상권에 속했다.



1914년 호남선 철길이 놓이면서 강경의 운명은 점차 변하기 시작했으나 그 명성은 1930년대까지도 이어갔다. 1937년에 발표된 채만식의 장편소설 <탁류(濁流)> 도입부를 살펴보자.

백마강은 공주 곰나루에서부터 시작하여 백제 흥망의 꿈자취를 더듬어 흐른다. 풍월도 좋거니와 물도 맑다. 그러나 그것도 부여 전후가 한참이지, 강경에 다다르면 장꾼들의 흥정하는 소리와 생선 비린내에 고요하던 수면은 깨어진다.

그러나 금강 주변에서 가장 번성했던 고을이란 명성도 이걸로 끝이었다. 광복 후 군산항이 황폐화되고, 한국전쟁 때엔 공공기관이 모여 있던 강경이 집중폭격을 당하면서 읍내 중심지 대부분이 파괴됐다. 즐비했던 일본식 집들도 이때 대부분 사라졌다. 한때 전국 규모를 자랑하던 강경장은 결국 시골 읍내의 작은 시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image
예로부터 강경지역에선 팔고 남은 막대한 양의 해산물을 처리하기 위해 일찍부터 염장 기술이 발달했다. 그러나 한국전쟁 이후엔 10여곳 만 겨우 명맥을 이어갔을 뿐이다. 1970년대에 들어서서 조금씩 살아나 1990년대 중반 20곳으로 늘어났다. 이후 젓갈축제를 열면서 다시 주목받기 시작해 지금은 무려 150여곳에 이른다. 강경 읍내에서 젓갈시장 둘러보는 재미도 쏠쏠하다.


그러나 강경에서 둘러볼 곳이 어디 젓갈시장뿐이겠는가. 읍내의 장터를 거닐고, 옥녀봉에 올라 포구를 내려다보며 강경을 느껴야 한다. 이렇게 발품 팔아 돌아다니다 보면 낡은 건축물마다 세월의 더께가 잔뜩 내려앉아있는 강경은 마치 영화의 야외세트장처럼 느껴진다. 여기선 시간도 천천히 흐른다. 그럼에도 강경은 결코 작은 고을이 아니다. 한바퀴 휙 둘러보면 끝나는 여느 시골 장터와 달리 골목길에서 여러차례 길을 잃고 헤매야 겨우 그 가닥을 잡을 수 있으니 말이다.

전성기였던 1세기 전에 세워진 문화재 답사는 강경 여행의 좋은 테마가 된다. 강경의 근대 문화재로는 남일당한약방(제10호), 북옥감리교회(제42호), 중앙초등학교 강당(제60호), 강경공립상업학교 관사(제322호), 강경노동조합(제323호), 한일은행 강경지점(제324호) 등이 지정돼 있다.



근대 문화재를 둘러보려면 헤맬 각오를 단단히 해야 한다. 이정표도 없고 안내판도 부실하기 때문이다. 그나마 강경읍 홈페이지에서 지도와 사진을 프린트해가면 큰 도움이 된다. 옥녀봉을 지나 천천히 둘러봐도 두어시간이면 넉넉하게 읍내를 돌아볼 수 있다. 그러나 장터의 허름한 막걸리집에서 발목이 잡힐지 모르니 시간을 좀 더 넉넉하게 잡는 것도 괜찮으리라.
image
강경 토박이 노인들은 강경을 ‘갱경’이라고 발음한다. 이 말엔 자부심이 그득하다. 강경상업정보고등학교 전신인 강경상고를 ‘갱경상고’라고 발음하는데, 강경지역에선 ‘갱경상고’ 출신들이 관공서 금융 등의 분야를 꽉 잡고 있다. 지금도 노인들은 ‘갱경상고’가 대전이나 서울의 웬만한 명문보다 더 일류학교로 알고 있다. 그 ‘갱경상고’를 졸업한 박용래(1925~1980) 시인의 시엔 강경의 허름한 뒷모습이 강변의 잔광처럼 아른거린다.

내리는 사람만 있고 / 오르는 이 하나 없는 보름 장날 막버스 / 차창 밖 꽂히는 기러기떼, / 기러기뗄 보아라 / 아 어느 강마을 / 잔광(殘光) 부신 그곳에 / 떨어지는가. - 박용래 시 ‘막버스’ 전문

이 시가 발표된 1979년 무렵, 그렇게 세월이 머물러 있는 것 같은 강경 분위기가 이 시에 잘 드러나 있다. 그렇게 또 30여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은 어떨까. 젓갈가게가 늘어난 것으로 빼고, 우어회와 황복국 잘하는 황산옥이 허름한 옛집에서 으리으리한 건물로 바뀐 것 빼고, 황산대교가 걸린 것 빼고는 그다지 변한 게 없다. 그리고 강경의 심장이었던 강경포구. 그 갈대숲 너머엔 과거를 영광을 추억하는 전시용 배가 몇척 떠있을 뿐이다.
image
염라대왕도 알 정도로 유명한 미내다리



강경 미내다리(충남유형문화재 제11호) 구경도 빼놓을 수 없다. 강경에서 논산으로 가는 23번 국도 강경천의 채운교가 있는 강둑을 조금 거슬러 올라가면 미내다리가 보인다. 다리 옆에 놓여 있던 ‘은진미교비’는 국립부여박물관에 보관 중인데, 비문에 따르면 1731년(조선 영조 7) 강경 사람인 송만운이 주도해 만들었다고 한다. 길이는 30m, 폭 2.8m, 높이 4.5m이며 석재는 화강암이다.

세월이 흘러 이젠 다리 역할을 못하고 있지만, 한때 강경을 오가는 사람들은 마차꾼부터 보부상은 물론이요, 선비들도 모두 이 다리를 건넜다. 그래서 논산 사람이 죽어 저승에 가면 염라대왕이 “너는 연산의 가마솥, 은진의 미륵불, 그리고 강경의 미내다리를 보았느냐”하고 물을 정도로 유명했다.

여행정보



●교통 경부고속도로→논산-천안간 고속도로→연무 나들목→68번 국가지원 지방도→강경 / 중부고속도로→호남고속도로지선→68번 국가지원 지방도→강경 <수도권 기준 2시간30분 내외 소요>

●별미 우어는 민물과 바닷물이 만나는 지역에 사는 웅어라는 물고기인데, 우어회는 금강 하류의 강경을 비롯해 부여, 군산 등에서 맛볼 수 있는 초봄의 별미다. 보통 2월 초순부터 잡히기 시작한다. 황산대교 근처의 황산옥(041-745-4836)은 90년 가까운 세월 동안 4대째 이어오고 있는 유명한 우어회 전문 식당. 우어회(3인분) 3만원. 생복찌개(소) 6만원, 복찌개(소) 4만원, 생복탕(1인분) 2만5000원, 복탕(1인분) 1만2000원.

●숙박 강경역 앞에 수정여관(041-745-1512), 금강파크(041-745-2700), 황산리 금강 쪽에 계룡장여관(041-745-4189), 옥녀봉 근처에 유명파크(041-745-4320) 등이 있다.



●참조 논산시청 대표전화 041-730-3224 www.nonsan.go.kr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