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 전회장이 지난달 금융위의 중징계 결정 취소를 요구하는 행정소송을 냈으니 도의적 책임을 떠나 그의 유죄 여부는 지켜보면 알겠지만 확실히 미국은 '격'이 다르다.
일전에 만난 전직 관료는 "20년 넘게 금융 감독업무를 했지만 '직무정지'라는 문책조항이 있다는 것은 황영기 회장 문책 때 알게 됐다"고 말하기도 했다.
#강정원 국민은행장은 황영기 전회장의 퇴진이 자신의 퇴진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생각은 미처 못했을 것이다. 그 정도 내공이었다면 황 전회장이 떠나자마자 전임 회장 측근이라며 실무 부서장들까지 내치진 않았을 것이고, 금융당국의 사인을 무시하고 후임 회장 선임을 그렇게 서두르지도, 강행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그건 오판이었고 착각이었다. 서브프라임 금융위기를 잘 극복하면서 관료집단은 경제금융분야에 관한 한 확실한 실세로서 위상, 전성기 시절의 '모피아' 파워를 회복하고 있었다.
2009년의 마지막날 강정원 행장의 KB금융 회장직 사퇴 발표는 그런 점에서 관료들의 천하평정 선언이기도 하다.
강 행장이 지금 선택할 최고의 수라면 10월까지인 은행장 임기를 채우는 게 아니고 36계 줄행랑일지도 모른다. 강 행장 특유의 어리석음을 가장하여 나아가기보다 물러나는 게 난세를 돌파하는 지혜가 될 것이다.
#글로벌 금융위기가 던진 메시지 중 하나는 '보이지 않는 손은 없다'는 것이다. 그 '보이지 않는 손'의 빈 자리를 메운 게 한국에선 관료집단이다. 그들은 세계에서 가장 먼저 한국이 경제위기에서 탈출하는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더불어 DJ정부 및 참여정부 때 그랬듯이 현 정부 들어서도 집권 중반기를 맞으면서 주변을 평정하고 명실상부 예전의 영화를 되찾는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힘으로 '금융권 최고의 승부사'라는 황영기 전회장과 '금융권 최고의 복장(福將)'이라는 강정원 행장을 단칼에 정리했다.
그런데 문제는 그 다음이다. 당장 KB금융 후임 회장과 국민은행장을 새로 선임하게 될 텐데, 신임 회장과 행장은 필연적으로 단임에 그칠 것이라는 사실이다. 더욱이 관과 권력의 후원에 힘입어 회장이 되고 행장이 된 사람은 곧 레임덕에 빠지게 된다.
불행은 KB금융과 국민은행에 그치지 않는다. 당장 3월말 회장 임기가 만료되는 신한금융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지, 그 답을 외부에서 찾아야 할 상황이다.
금융위기 속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수익성과 건전성을 유지한 신한금융그룹까지 CEO 리스크와 지배구조 리스크에 노출돼 흔들릴 수 있다. 금융권과 투자자들의 눈은 이제 KB금융이 아니라 신한금융으로 쏠리고 있다.
사람이 죽으면 울리는 교회의 종소리는 다른 누군가가 아닌 나의 죽음을 예고하는 것이다. '누구를 위해 종은 울리나'라는 물음에 대한 정답은 바로 '나자신'이다.
KB금융과 황영기 강정원의 불행과 눈물, 한숨에 마냥 고소해할 수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