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과 시장] "여러분 감사합니다"

정기동 변호사 2010.01.11 07: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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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과 시장] "여러분 감사합니다"


멸망한 지구, 법도 시장도 먹을 것도 입을 것도 없어지고 생존을 위한 만인에 대한 만인의 투쟁만 남아 있다. 총칼을 가진 힘 있는 자들은 사람을 잡아먹기 위해 사냥하고 사육하는 원시 야만의 시대로 돌아가 버린 세상. 아무런 희망도 없는 참담한 세상을 더 이상 견디지 못하는 엄마는 어린 아들을 두고 먼저 목숨을 끊고, 세상의 많은 가족들이 함께 죽음을 선택한다.

그래도 아버지는 자신의 존재 이유인 어린 아들을 남쪽 바닷가로 데려가기 위해 '마음의 불씨'를 꺼뜨리지 않고 배고픔과 식인 갱들과 하루하루 사투를 벌인다. 그러다가 누군가가 남겨 놓은 식량 창고를 우연히 발견한다. 부자는 얼마 만인지도 기억 못 하는 인간적인 식사를 앞두고 말한다. "누군지 모르지만 여러분, 감사합니다(Thanks, people)."



코맥 맥커시의 같은 이름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 '더 로드'의 한 장면이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인류의 문명이 송두리째 파괴된 뒤, 오로지 남은 것은 생존의 본능. 어떤 희망도 남아 있지 않다는 듯 시종일관 화면을 가득 채운 거친 잿빛 살풍경보다, 지하창고에 벌거벗긴 남녀를 함께 가두고 양식으로 일용하는 인간의 폭력성보다, 아버지가 죽고 혼자 남은 아이에게 역시 남쪽 바닷가로 가고 있는 다른 가족이 내민 손길보다 더 인상 깊었던 것은 저녁식사를 앞 둔 이 장면이었다.

시뻘건 욕망과 핏빛 본능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도 품격을 잃지 않은 인간이 타인에게, 누군지는 모르지만 먹을 것을 준비해 둔 '사람들'에게 보내는 따뜻한 감사의 인사였다.



다시 새해가 시작되었다. 'Y2K'니 '밀레니엄 버그'니 하면서 새천년 시작의 법석을 떤 것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십 년 전의 일이다. 세월의 쏜살같음에 우선 기가 꺾이고, 보람과 성취보다 후회와 아쉬움이 앞서는 레퍼토리가 되풀이될 것이 뻔한 노릇이지만, 그래도 새해가 시작될 때마다 돌아보고 내다보는 일을 피하지는 못한다. 지난 십년간 우리는 무엇을 얻고 무엇을 잃었으며, 세상은 얼마나 따뜻해졌고 얼마나 황량해졌을까. 새로운 십 년은 어떻게 변할 것이며 나는 또 어떻게 달라질 것인가.

새해에는 먼저 감사하고 싶다. 가까이는 함께 일하는 사무실의 동료에게 감사하다. 새해 벽두의 그 엄청난 폭설을 놀랍도록 빠르고 깔끔하게 치워준 아파트의 경비 아저씨들과 사무실 관리인에게 감사하다. 또한 폭설 때문에 새벽 2시까지 연장 근무한 지하철 근로자들에게도 감사하다. 용산참사 희생자들의 장례식이 치러질 수 있도록 지난 1년 간 애쓴 대책위원회와 시민들에게 감사하고, 합의에 응한 정부와 서울시에도 감사하다.

날로 욕망이 염치를 이기는 세상에서 크고 작은 희생을 감수하고 연대의 손길을 내민 모든 사람들에게 감사하고 존경심을 갖는다. 세상은, 그리고 내가 누리고 있는 것은 내 잘 난 탓에 존재하는 것이 아님을 깨닫는다. 그래서 새해에는 사무실의 동료들을 더 신뢰하고, 아파트 경비 아저씨들에게 작은 감사의 인사를 건네고, 지하철 파업에도 짜증내지 않으려고 노력하련다. 무엇보다 새해에는 내가 가진 작은 지식이라도 이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첫 걸음을 떼려고 한다.


영화에서 혼자 남은 어린 아들을 거둔 그 가족이 무사히 남쪽 바닷가에 이르게 될지는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보호하여야 할 아이가 한 명 늘어남에 따라 그만큼 커지는 위험에도 불구하고 기꺼이 내미는 그 손길에 의해 잿빛 세상에도 희망의 싹이 생기고 마음의 불씨가 꺼지지 않을 터이다.

다시 새해가 됐을 때 똑같은 후회와 아쉬움이 앞서더라도 새해에는 그렇게 사람들에게 감사하면서 노력하고 싶다. 여러분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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