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거북이 출근길, 욕하지 마라

머니투데이 심재현 기자 2009.12.30 09: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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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수첩]거북이 출근길, 욕하지 마라


#. 지난 27일 서울 외곽도로. 화물을 실은 트럭이 중형 승용차를 덮쳤다. 트럭은 승용차를 그대로 밀고 나가 3중 추돌했다. 승용차에 타고 있던 두살배기 아이는 자지러지게 울었다. 경찰이 도착했을 때 사망자는 없었다. 사고자들은 가벼운 부상만 입었다. 세밑을 수놓은 눈길 교통사고였다.

눈길 사고 사망자는 일반적인 교통사고 사망자의 60%에 못 미친다. 교통사고 100건당 사망자 수는 도로에 눈이 쌓였을 땐 2.3명, 일반적인 조건에선 4.1명이다.



경찰청에선 "서로 방어운전을 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거리는 얼어붙고 뒤엉킨 차량에 출퇴근 짜증은 잦은 접촉사고로 이어지지만 느림보 운전에 서로 조심하는 덕에 사고 사망자는 도리어 줄어든다는 얘기다. 느림의 미학, 배려의 효과다.

#. 올 한해 정치권에선 너나할 것 없이 속도전을 외쳤다. 새해 벽두부터 몸싸움으로 물들었다. "밀어붙여라" "막아라"는 고성은 잠시도 끊이지 않았다. 집권여당 대표가 "빨리빨리"를 독려하면 제1 야당 대표는 "결사항전"으로 맞받는 식이었다.



7월 미디어법 강행처리는 세계 언론에까지 오르내렸다. 여당 상임위원장은 신속한 처리를 위해 반대 토론을 무시하고 의사봉을 두드렸다. 야당 의원들은 법안 처리를 막는다며 '발 빠른' 점거농성을 폈다. 대리투표 의혹과 투표방해 혐의가 난무하는 민의의 정당에 '배려'가 들어설 자리는 없었다. 특사외교를 다녀온 의원들은 상대국 파트너의 뼈있는 '농담'에 얼굴이 뜨거웠다고 고백했다.

미디어법, 세종시, 4대강 사업 같은 굵직한 현안 말고도 여야는 사사건건 부딪혔다. 비정규직법 개정, 개헌론, 국정감사를 두고 막말이 오갔다. 협상을 위한 자리에서도 '남 탓'이 먼저였다. 한 초선의원은 "국회에 들어와 가장 많이 들은 말이 '네 탓'"이라고 말했다. 정쟁을 중재하려는 여야 중진의 목소리는 '네탓 공방' '속도전 고성'에 파묻히기 일쑤였다.

#. 여야는 새해 예산안 처리를 두고 다시 서로를 노려보고 있다. 마감 시한은 이제 이틀 남았다. 둘 사이 간격은 여전히 멀다. 그동안 파인 감정의 골도 깊다.


정치권에선 사상 초유의 준예산 편성 사태를 우려하고 있다. 하지만 국민은 걸핏하면 몸싸움을 벌이는, 배려가 실종된 정치수준을 더 걱정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 눈 내린 아침, '거북이 출근길'을 욕만 할 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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