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권 대 충청 민심의 충돌이 핵심이다. 청와대와 정부는 국가백년대계를 위해 세종시 원안을 수정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행정 비효율 때문에 수정은 불가피하다는 것. 충청권은 이에 미심쩍은 시선을 보내고 있다. 굳이 수정까지 할 필요가 없는 사안인데 왜 바꾸려 하냐는 반발이다.
세종시와 다른 지역의 갈등도 대립 축으로 등장했다. 정부가 설득을 위해 각종 혜택을 제공하려하자 다른 기업·혁신도시 지역들이 들고 일어났다. 여당인 한나라당 내부에서 관련 지역구의 의원들은 지역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동분서주하고 있다. '표 떨어지는 소리' 때문이다.
국가백년대계는 무엇인가. 말 그대로 풀자면 국가의 향후 백년을 위한 큰 계책이다. 미래발전전략이자 비전이다. 그렇다면 세종시의 수정이 왜 국가백년대계가 되는가. 행정 비효율에 대한 우려에서 국가백년대계를 끄집어 내기에는 왠지 그릇이 작아 보인다. 국토균형발전이란 담론의 외연과 깊이는 행정비효율에 비해 훨씬 넓고 깊게 다가온다.
연역법은 그 반대다. 일반적인 사실이나 원리를 먼저 세운 뒤 개별적인 사실이나 원리를 뽑아낸다. 경험이 아닌 논리에 따르는 것으로, 삼단논법이 대표적인 형식이다. '새는 동물이다. 닭은 새이다. 따라서 닭은 동물이다'는 사고방식이다. 연역법은 주로 직관에 의존한다. 일반 원리에 따라 세부결과들이 크게 달라진다.
#왜 청와대와 정부는 충청권 민심 나아가 다른 지역의 민심과 갈등을 일으키게 됐을까. 국가백년대계를 위해 꼭 필요한 일인데, 왜 국민들이 이를 제대로 알아주지 않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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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시 전략과 정책을 펼쳐내는 방식에 결정적인 오류가 있었던 것은 아닐까. "국가백년대계를 위해서 필요하니 밀어 붙인다"는 사고는 지나치게 연역적이다. 정책방향이 맞을지라도 심리적 반발과 저항에 부딪힐 수 있다. 세종시처럼 풀기 어려운 복합방정식일 경우 더욱 그렇다.
#과거 왕조시대의 정치가 연역형 정치였다면 민주정치는 귀납형 구조를 지니고 있다. 집권세력은 선거를 통해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민심을 얻어야 한다. 하지만 한국 정치는 형태상 귀납형 구조지만 운영방식은 왕조시대의 연역형 정치행태를 유지하고 있다. '보스정치'란 낡은 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 국회에서 여야 사이에 합리적인 비판과 건설적인 타협이 성사된 적은 거의 없다. 힘을 얻은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물리적으로 제압한 뒤 윽박지르는 관행이 되풀이되고 있다. 당연히 눌리는 쪽도 목숨 걸고 저항하게 된다. 다른 색깔을 지녔지만 '대의'에 따라 합리적인 논의와 합의에 도달하는 경우를 찾아보기 힘들다.
#연역형의 정치는 자칫 폭력논리로 치닫기 쉽다. 과거 왕이 자신의 뜻을 거스르는 세력을 무자비하게 제거했듯 말이다. 스스로를 지고지선으로 여기고 다른 세력을 '악의 축'으로 규정하기 때문이다.
세종시 논란은 이같은 한국정치의 한계 속에서 파장이 더욱 커지고 있다. 여권 내부에서 나오기 시작한 "충청권이 끝까지 원하지 않는다면…"이란 발언은 지나치게 늦었다. 여당 내부에서는 세종시 수정을 탐탁치 않게 여기고 있는 의원들도 많다. 친박(친 박근혜)계를 넘어서 친이(친 이명박)계에서도 초기부터 반대 목소리가 있었다.
하지만 수정 추진 작업은 낡은 연역형의 틀 속에서 이뤄졌고 결국 민심과 충돌하는 사태로 이어졌다. "국가백년대계를 위해 필요한데 반대하지 말라"는 설득은 이 충돌 속에서 힘을 잃는다.
아래에서 위로 흐르는 민심을 존중하지 않는다면 제 아무리 큰 계책이라도 효과를 발휘하지 못한다. "이게 갈 길이니 따라오라"는 낡은 연역형 방식은 더이상 민심을 얻지 못하는 시대다. 세종시는 달라진 민심(소프트웨어)과 변하지 않는 정치방식(하드웨어)이 갑작스레 정면충돌한 현장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