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먼1년, 현장 비사]"달러, 씨가 말랐다"

뉴욕=김준형 특파원 2009.09.14 07:00
글자크기

위기의 한국경제, 격동의 뉴욕 45일(상)

편집자주 리먼브러더스 붕괴이후 국제금융 시장에서 한국경제는 풍전등화의 위기로 치달았었다. 국제통화기금(IMF) 사태를 넘긴 내성과 2000억달러가 넘는 외환보유고 등의 방호벽에도 불구, 글로벌 시스템의 한 축인 이상 속절없이 빠져들고 말았다. 머니투데이는 그 날의 쇼크이후 전환의 계기가 된 한미 통화스왑까지 45일간의 피말랐던 격동의 순간을 상, 하 2회에 걸쳐 재구성했다.리먼 파산을 맞아 위기의 중심 뉴욕에서 펼쳐졌던 한국 관계당국자들의 좌절과 대응 등에 대한 첫 현장 기록이다.

-리먼 부도 다음날 리포 채권 막판 회수
-한국은행 자금위기, 9월말 최고조
-통화스왑 논의 본격 시작


"리먼이 문닫을 것 같다"

1년전인 2008년 9월14일. 한국의 추석 연휴를 맞아 캐나다의 친척집을 방문하고 돌아오던 윤용진 한국은행 뉴욕사무소 부국장(외환운용 데스크)의 핸드폰을 통해 모 미국 투자은행 브로커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날 맨해튼 남단 월가 복판에 자리잡은 뉴욕 연방은행 건물에서는 헨리 폴슨 재무장관 주재로 리처드 풀드 리먼 브러더스 회장을 제외한 미 주요 투자은행 최고경영자(CEO)들이 머리를 맞댔다. 이들은 세계를 뒤흔들 금융위기의 도화선을 당겼다.

유동성 위기의 화염에 휩싸인 리먼은 뱅크 오브 아메리카(BOA)에 이어 바클레이즈와의 매각 협상이 마지막까지 접점을 찾지 못하면서 결국 청산으로 가닥을 잡았다.



이날 오전 9시 뉴욕 연방은행은 투자은행들의 CDS(신용부도 스왑)트레이더들을 소집했다. 리먼이 부도가 날 경우 CDS거래를 어떻게 청산할 것인지를 논의하기 위한 것이었다.
리먼 대책회의에 참석했던 은행 CEO들은 회의를 마치고 건물을 나서며 휴대폰을 들었다. 주요 고객들에게 리먼의 운명을 귀띔해줄 것을 회사 경영진에게 지시하기 위해서였다.

↑ 9.11 8주년을 맞은 지난 11일.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의 바클레이즈(옛 리먼브러더스)건물 외벽 전광판이 대형 성조기로 꾸며져 있다. 2008년 9월15일 리먼의 파산 결정으로 세계는 사상 유례없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뉴욕=김준형 특파원] ↑ 9.11 8주년을 맞은 지난 11일. 뉴욕 맨해튼 타임스퀘어의 바클레이즈(옛 리먼브러더스)건물 외벽 전광판이 대형 성조기로 꾸며져 있다. 2008년 9월15일 리먼의 파산 결정으로 세계는 사상 유례없는 글로벌 금융위기의 소용돌이 속으로 휩쓸려 들어갔다.[뉴욕=김준형 특파원]


수백억달러의 외환보유고를 운용, 미 주요 투자은행들에게도 '큰 손 고객'으로 분류되는 한국은행으로도 이같은 정보가 흘러 들어온 것이다.

브로커의 이야기를 들은 윤부국장의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리먼은 세계 40여개 중앙은행과 리포거래를 유지하고 있었고, 한은 역시 리포 거래 잔액이 남아 있었다.


윤부국장과 홍동수 차장은 월요일인 다음날 타임스퀘어의 리먼 브러더스 본사까지 한걸음에 달려갔다. 빚잔치가 벌어지고 있었다. 당시 리먼에 마지막까지 남은 유동성은 약 300억달러. 동작 빠른 기관이 먼저 챙겨 갈수 있었다.
리먼 리포 책임자에게 "이 바닥 아주 뜰거냐?"고 몰아부친 끝에 연준의 전자결제망 마감시간(오후 2시30분)을 연장하며서까지 겨우 채권을 회수할 수 있었다.
한국은행이 리먼과의 거래로 자산이 묶일 경우 적지 않은 신인도 타격이 있었을 것이고 한국 금융시장 불안도 가중될 수 있었던 아슬아슬한 순간이었다.

그해 3월14일 베어스턴스 파산이후 금융시장 악화 가능성에 대비, 리포 거래나 국영 모기지업체 패니 매와 프레디 맥 채권 규모를 줄여온게 그나마 천만 다행이었다.

하지만 문제는 이때부터 본격화되기 작했다.
리먼 붕괴 불똥이 리먼채권이 포함된 머니마켓펀드(MMF)까지 번지면서 MMF시장이 완전히 마비됐다. 미국은 물론, 유럽과 아시아 금융기관들이 유동성 확보를 위해 돈줄을 꽉 움켜쥐고 크레딧 라인을 끊기 시작했다.

[리먼1년, 현장 비사]"달러, 씨가 말랐다"
한국 금융기관들의 유동성 문제가 심각하다는 루머가 단기 머니마켓 트레이더들을 중심으로 빠르게 확산돼 갔다.

한국계 은행 뉴욕 지점장의 회고. "외환보유고가 2500억달러에 달하는 대만계가 가장 먼저 한국계 은행들과 거래를 끊었다. 심지어 우리보다 신용도가 훨씬 낮은 태국 같은 나라의 금융기관들도 한국과 거래중지령이 내렸다면서 거래를 끊겠다고 해 어처구니가 없기도 하고 비애감이 들기도 했다"

한 자금중개 브로커는 "당시 자금 중개 단말기 스크린에 온통 한국계 지점들의 자금 주문(bid)만 새까맣게 떠 있었지만 실제 자금을 조달해 가는 곳은 가뭄에 콩나듯했다"고 말했다.

금융감독원 기획재정부 한국은행 등 뉴욕에 파견돼 있는 금융 당국들의 일손도 바빠졌다. 매일매일 금융권의 해외 자금조달과 결제 상황을 체크하며 하루하루를 넘기는 날들이 이어졌다. 산업은행 명의로 단기 자금을 조달, 국내 은행들이 나눠 쓰기도 했다.

9월 30일은 최대 고비였다.
이날은 일본의 회계연도말 결산일이었다. 여기에 금융구제법안이 미 의회에서 부결되면서 영국 자금시장에서 하루짜리 달러 조달 금리(달러 리보)가 6.88%로 사상최고치로 치솟아 올랐다. 불과 1주일전만 하더라도 달러 리보 금리는 2.95%에 불과했다.
아시아, 런던, 뉴욕 금융시장에서 순차적으로 금리가 급등했다. 금융기관들은 아시아 런던 등에서 대부분 자금을 조달하지만 뉴욕에서까지 돈을 빌리지 못하면 말 그대로 부도가 난다.

이날 국내 은행권이 뉴욕 금융시장에서 조달해 결제해야 하는 자금은 32억달러에 달했다. 하지만 금융기관들은 한국계 은행들에 대해서는 중단기 기간물 자금은 물론 오버나이트 자금조차 거절했다. 한 시중은행 자금 담당자는 "만약 한국계 은행 가운데 단 한곳만이라도 자금을 막지 못하면 연쇄 줄 도산이 날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돌이켰다.

"달러가 씨가 말랐다. 돈줄이 완전히 끊겼다"는 SOS가 한국은행과 금융감독원 기획재정부로 쏟아졌다. 본점과 금융당국의 지원사격을 받아 낮 12시반, 한국시간 새벽 2시반이 넘어서야 돈을 구할 수 있었다. 씨티 등이 한국계 은행에 오버나이트 자금을 빌려주면서 적용한 금리는 무려 리보+400bp(4%p).

겨우 고비는 넘어갔지만 한국이 본격적인 '유동성 위기'에 빠져들고 있다는게 확실해졌다. 이미 파이낸셜 타임스같은 외국 언론은 이달 초부터 한국이 금융위기를 겪을 가능성에 대해 보도를 쏟아내고 있었다.

기재부는 외환보유고를 풀어놓았지만 환율은 급등가도를 이어갔고 한국의 신용부도스왑(CDS) 가산금리는 치솟았다.

이미 한국 정부 정책만으로는 국제 금융시장의 신뢰를 회복하기 힘든 단계에 접어들고 있었다.

남은 방법은 한국은행과 연방준비제도이사회와의 중앙은행간 통화스왑의 물꼬를 트는 것이었다.

통화스왑의 아이디어가 새로운 것은 아니었다.
연초에도 금융시장 안정을 위해 연준과의 통화스왑 가능성을 타진했던 한국은행은
연준의 해외 중앙은행과의 통화스왑 주체인 뉴욕연방은행의 티머시 가이트너 당시 총재(현 재무장관)로부터 부정적인 답변을 들었었다. 통화스왑은 기축통화를 보유한 AAA 신용등급 국가 중앙은행간에 해당되는 일이라는게 연준의 기본 원칙이었다.

이때문에 한은은 연준과의 자산스왑을 검토했다. 한은이 보유한 채권 등 자산을 환매조건부 매입이나 유동성 자산과 교환하자는 아이디어였다. 하지만 연준법상 외국 중앙은행은 이같은 자산 스왑 대상이 아니었다.

결국 남은 선택은 통화스왑을 밀어부치는 일이었다.
마침 28일 연준이 유럽중앙은행(ECB)등 중앙은행과의 통화스왑 한도를 확대하는 동시에 호주 등을 새 통화스왑 대상국으로 확대했다.

'호주가 된다면 한국이 안될 이유가 없다'
이응백 한국은행 투자운용실장의 지시로 윤용진 부국장이 1일 금융시장국(Market Group)을 책임지고 있는 윌리엄 더들리 뉴욕연은 수석부총재(현 뉴욕연은 총재)에게 면담을 신청했다.

더들리 부총재와의 약속은 의외로 쉽게 잡혔다.
패트리샤 모서 금융시장국장은 "미국 시장에서 가장 적극적으로 자금을 운영하고 있는 아시아 중앙은행인 한국이 통화스왑을 요청한 것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고 돌이켰다.
외국 중앙은행 움직임은 뉴욕, 다시 말해 세계 최첨단 금융시장을 관리하는 뉴욕 연은 마켓그룹의 초미의 관심사일수 밖에 없다.
외국 중앙은행이 미국 채권을 팔아 치우면 그만큼 금리는 올라가고 시장불안감이 확대되며 미 재무부와 연준의 시장안정책은 빛이 바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한국은 지난해 초 베어스턴스 사태 이후 꾸준히 미 국채와 매니매, 프레디 맥 채권 보유규모를 줄여왔고, 9월 리먼 사태 이후 채권매각 속도를 더욱 높이고 있었던 터였다.

강만수 당시 부총리가 이후 10월14일 열린 세계은행 연차총회 등에서 통화스왑을 주장하는 논리로 제시했던 이른바 '리버스 스필오버(Reverse Spill Over)' 현상은 연준에서도 이미 면밀히 주시하고 있던 바였다.
(하편으로 이어짐)

이 기사의 관련기사

TO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