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30년 주기 국상(國喪)

머니투데이 유승호 부국장대우 산업부장 2009.09.09 09: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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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화문] 30년 주기 국상(國喪)


공교롭게도 근·현대사에서 30년마다 국가적으로 큰 장례를 치렀다. 고종이 1919년 1월21일 승하한 이래 김 구 선생이 1949년 6월25일 흉탄에 암살당하고 박정희 대통령이 1979년 10월26일 궁정동에서 급서했다. 그리고 30년 후인 2009년 올해 노무현·김대중 전 대통령이 모두 서거했다. 혹자는 이를 두고 '30년주기 국상'이라 얘기한다. 정확히 30년 간격인 것을 새삼스럽게 따져보면서 묘한 전율마저 느낀다.

'국상'(國喪)은 사전적으로 '국민 전체가 상복을 입는 왕실의 초상'을 의미한다. '국상'은 왕뿐만 아니라 왕비, 왕세자, 왕세손비 등 왕실의 장례가 모두 포함된다. 액면 그대로 보면 이미 조선시대로 수명을 다한 왕조 용어인 셈이다. 그러나 국가 수반을 역임하고 국가 또는 사회에 현저한 공적을 남김으로써 국민의 추앙을 받는 인물이 돌아가셨을 때 수백만 명의 국민이 조문하고 애도하면서 장례를 치렀다면 광의의 국상이라 할 수도 있을 것이다.



돌이켜보면 망자들의 죽음엔 그 시대의 꿈과 좌절이 동시에 뒤엉켜 있다. 그들의 장례식에서 슬픔이라는 하나의 감정으로 용해되지만 장례가 끝나고 나면 꿈은 꿈대로, 좌절은 좌절대로 제각각이 되기도 한다.

헤이그에 밀사를 파견했으나 실패해 폐위의 비운을 겪은 고종의 죽음은 자주국가에 대한 한을 심어줬다. 독립된 통일 조국을 열망하던 김 구 선생의 죽음은 통일의 염원을, 산업화의 초석을 마련한 박정희 전 대통령의 죽음은 정치적 민주화란 숙제를 남겼다. 동서통합을 자신의 최대 정치적 목표로 삼은 노무현 대통령과 남북통일을 위해 매진한 김대중 대통령의 죽음은 사회통합과 남북통일의 시대정신을 되새기게 했다.



그들의 유산은 역사 속에서 순탄하게 실현되지만은 않았다. 때로는 엄청난 대가를 치렀다. 그 대가는 힘없는 민초들에게 가장 혹독하게 닥쳐오곤 했다. 격동의 세월 90년, 그들의 퇴장은 굴절 많은 역사의 극단적인 단면들과 맞물려 있다.

고종이 승하한 1919년에는 민족자결의 의지를 국제사회에 표출한 3·1운동이 일어났고, 통일된 나라를 염원하던 김 구 선생이 서거한 1년 뒤엔 동족상잔의 비극을 겪기도 했다. 박정희 대통령 서거 1년 후에는 광주민주화운동이 일어났다.

'주기설'이라는 것은 다분히 미신적이고 싱겁다. 더욱이 90년 전, 60년 전, 30년 전과 비교하면 한반도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다. 그 시대들과 비교하는 것조차 어불성설일 수 있다. 하지만 미신적 요소를 빼고 그 속의 함의를 곱씹어보면 필요한 경계심을 되새겨주는 효용성이 있다.


30년 만에 '국상'급 장례식을 3차례나 치른 올해 정치·경제지도자들은 사회통합과 남북관계 대응 등에 더욱 신중을 기해야 한다. 역사적 거인들은 자신이 속한 사회세력을 대표해 모순을 극대화하기도 하지만 모순의 폭발력을 조절해주는 완충역할을 수행하기도 한다. 좌절한 사람들에게 좌절을 희망으로 재생해 합리적으로 표출하도록 도와주는 기능도 한다.

아이로니컬하게 사회의 모순을 대표하던 사람들이 사라지면 모순이 줄어들 것같지만 정반대가 될 수도 있다. 정치적 거물들이 무대에서 사라졌을 때 사회적 통합을 위한 노력이 더욱 필요한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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