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부 도려낸 '칼질'… 환자 살려낸 '수술'

머니투데이 박재범 기자 2009.09.08 08: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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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로벌 금융위기 1년] (2) '구조조정 칼자루' 다시 쥔 은행

# 글로벌 금융위기는 금융정책의 변화를 요구했다. 기존 정책의 수정은 아니더라도 우선순위 조정이 불가피했다. 금융자본과 산업자본의 분리(금산분리) 완화, 산업은행 민영화 등 현 정부의 역점정책 앞에 '기업구조조정'이 놓였다. 몇년 동안 기억에서 사라졌던 '기업구조조정'이 다시 회자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 전까지만 해도 '구조조정'이란 단어 앞엔 '상시적'이란 수식어가 따라붙었다. 위기 이후엔 '강력한' '신속한' '과감한'이 그 자리를 대신했다. 물론 금융당국이 처음부터 강한 의지를 갖고 있던 것은 아니었다. 한 당국자는 "글로벌 금융위기가 강제한 측면이 없지 않다"고 했다. 다만 위험한 부분들을 미리미리 챙긴 게 적잖은 도움이 됐다.



"글로벌 금융위기에 앞서 1년간 신용경색 국면이었습니다. 안 좋은 기업들은 이미 그 때부터 환부가 드러나고 있었던 것이죠. 시장에서도 몇몇 그룹의 이름이 거론되지 않았습니까".

# 외환위기 이후 칼자루는 은행으로 넘어갔다. '상시 구조조정 시스템'이 그랬고 법으로 보장된 제도적 장치가 그랬다. 당국이 직접 개입해 칼을 휘두를 명분도, 근거도 없었다. 그렇다고 마냥 '민간'에 맡겨두기엔 상황이 여의치 않았다. 구조조정 프로그램과 일정을 짜고 '독려'하는 일은 당국의 몫이었다. '기업재무구조개선단'이 발족한 이유다. 목적은 '칼질'이었다.



다만 10년 전 칼질이 회생 불가능한 기업을 자르는 데 중점을 뒀다면 이번엔 기업을 살리기 위한 수술용 칼질에 방점이 찍혔다. "기업구조조정이라고 하면 정리하기 위한 것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기본적으로는 기업을 살리는 데 중점을 둘 것입니다." 기재단 단장을 맡은 김종창 금융감독원장의 말이다.

# 실무자가 말을 받는다. "기재단이 발족하면서 첫 방향을 잘 잡았습니다. 금감원장의 메시지가 확실히 전달됐습니다. 전문용어(?)로 '머리가르마'를 잘탄 것이죠."

여기서 방향은 업종별 구조조정에 착수한 것을 가리킨다. 1차로 건설·조선업종이 도마에 올랐다. 하지만 갑갑했다. 유동성이 부족하고 부실이 커지는 등 상황의 심각성 때문만은 아니었다.


실제 '칼질'을 하기 위해 필요한 기본적인 것들이 하나도 없었다. "대기업 구조조정의 경우 이미 시스템이 마련돼 있습니다. 법적·제도적 장치도 있어요. 만들어져 있는 평가기준에 따라 채점하고 합격과 불합격을 가리면 됩니다. 등급에 맞춰 정해진 프로그램대로 돌리면 되죠. 반면 건설·조선업종은 말 그대로 '무'의 상태였습니다. 특수성이 워낙 강한 업종들이란 별도의 기준을 만들어야 했죠."

# 칼질에 앞서 '룰'이 필요했다는 얘기다. 당연하지만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무'에서 '유'를 만드는 작업이었다. 당국은 태스크포스(TF)를 구성했다. 각 은행에서 심사·평가업무의 최고 베테랑을 모았다. 이들에게 주어진 시간은 채 보름도 안됐다. 그 짧은 기간에 건설업종과 조선업종의 심사평가 지침서를 만들어야 했다.

가장 적게 일한 게 하루 13시간이었을 정도로 강행군을 이어갔다. 그렇다고 골방에서 몇 차례 회의만 거쳐 살생부를 만들 수는 없는 노릇. 담당자는 초안을 토대로 시뮬레이션을 해보고 문제점이 확인되면 수정을 가하는 작업을 반복했다. 해당 업계 인사들에게도 직접 묻고 현실 적합성 여부를 따졌다.

"옥석을 가리기 위한 그물망을 만드는 작업이었습니다. 너무 촘촘하게만 만들어도, 너무 여유있게 만들어도 안됐죠. 가망없는 기업은 걸러내되 희망있는 기업은 빠져나갈 수 있는 그물을 만들어야 했습니다. 그것을 해냈다고 자부합니다."

업종별 구조조정을 담당한 인사의 말이다. "이 작업으로 사실상 업종별 구조조정은 끝난 것과 마찬가지였습니다." 해운업 구조조정 때도 비슷한 과정을 밟았다. 그렇게 만들어진 '매뉴얼'은 이제 구조조정의 '바이블'이 됐다.

# 그뒤 대기업그룹의 구조조정이 이어졌다. 채권은행별로 평가가 진행됐다. 이미 '채점표'가 있었기에 작업은 어렵지 않았다. 그렇지만 과정은 역시 순탄치 않았다. 해당 기업들의 반발이 문제였다. "왜 우리 회사가 불합격이냐"는 항의는 기본이었다.

재무구조 개선약정 체결을 앞두고도 속을 썩였다. 해외출장을 나갔다가 귀국하는 그룹 회장의 서명을 받기 위해 채권은행 관계자가 직접 공항에 나간 것은 작은 예에 불과했다. A그룹 회장은 약정내용이 만족스럽지 않다며 서명을 미룬 채 지방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 애를 태우기도 했다.

강하게 밀어붙어야 할 은행이 간혹 머뭇거리는 경우도 있었다. 금융당국 관계자는 이런 해석을 내놨다. "갑과 을의 관계가 변한 것이죠. 과거엔 돈줄을 쥔 은행이 갑이었지만 지금은 다릅니다. '고객'인 기업을 놓칠까 눈치를 보곤 하죠."

반론도 있다. 은행과 호흡을 맞춰온 인사의 말은 다르다. "그래도 채권자의 위상은 여전합니다. 기업이 이러저러한 핑계로 피해갔을 뿐이지 은행은 자기가 살기 위해서라도 열심히 했습니다." 여하튼 은행은 당국 못지않게 구조조정의 중요한 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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