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주화·돌려막기… 비정규직 현장 백태

머니투데이 신수영 기자 2009.08.17 0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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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원에 근무하던 K씨는 지난 7월1일 직장을 잃었다. 6월30일 자정까지도 '계속 근무할 수 있을지 모른다'며 희망을 버리지 않았으나 결국 다음날 아침에 계약이 해지됐다.

생활비도 문제지만 병중인 아버지 걱정이 앞선다. 병원 직원은 진료비의 30%를 할인받는데다 출퇴근 시간이 정확해 근무조건이 좋았다. 병원에서는 파견회사를 통해 재입사할 것을 제안했지만 근무조건 악화가 걱정돼 거절했다.



노동부가 지난 7월 지방 근로감독관을 통해 입수한 한 비정규직 근로자의 해고 사례다. 비정규직들에게는 '운명의 날'(7월1일)이 지난 지 한 달 반여가 흘렀다. 이날부터 비정규직 근로자가 고용기간 2년이 넘으면 정규직으로 전환된 것으로 간주하는 고용제한 조항이 적용됐다.

아직까지 이들에 대한 정확한 현황은 파악되지 않고 있다. 노동부는 전국 1만개 표본 사업장을 대상으로 고용동향을 조사 중이다. 실제 현장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까.



◇'돌려막기' 등 각종 편법 등장=일부 사업장에서는 비정규직법 적용을 피하기 위한 각종 편법 사례가 등장했다. 제조업의 경우, 외주화가 가장 흔하다. 직원을 해고한 뒤 파견업체를 통해 재입사 시키거나, 아예 파견업체를 세워 재고용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법인을 하나 설립해서 비정규직 근로자를 그 회사로 옮기는 게 유행"이라며 "예전 직원을 그대로 쓰면서도 법 적용은 피할 수 있다"고 말했다.

비슷한 업종에 있는 기업끼리 근로자를 맞바꾸는 소위 '돌려막기'도 많다. 대기업 협력사로 전자부품을 생산하는 A사가 한 예다. 이들 두 회사는 같은 건물에 공장이 있고 각 회사의 근로자가 하는 일도 같다.


얼마 전 A사와 대기업은 핵심 비정규직만을 남기고 나머지를 해고했다. 그리고 서로의 파견업체를 맞바꿨다. 결과적으로 A사와 대기업의 핵심 비정규직 50~100명이 맞교환됐다.

A사는 해외로 생산라인을 이전하는 방안도 검토 중이다. 비용상 비정규직을 쓸 수밖에 없는데 편법을 계속 쓰기도 어려운 노릇이기 때문이다.



◇일단 해고…이참에 구조조정도=2년이 된 비정규직 근로자를 일단 내보내고 보는 사업장도 있다. 경기도 수원의 B연구기관은 지난 7월1일자로 고용기간 2년이 된 비정규직 4명을 계약해지했다. 올해 말까지 고용기간 2년이 돌아오는 비정규직(기간제) 근로자는 130명으로, 모두 해고할 예정이다.

해고 후 다른 직원을 채용하면 최소한 고용총량은 유지된다. 그런데 경기불황을 이유로 해고 후 해당 일자리를 없애기도 한다. 비정규직법을 빌미로 구조조정을 실시한 경우다.

휴대폰용 전자부품을 만드는 B사는 최근 비정규직 근로자 전원(약 100명)을 해고했다. 이 과정에 정규직 근로자 수십명도 함께 내보냈다. 전체 인원의 30%가 감원됐다.



회사 내부자는 "휴대폰 경기 불황으로 어려운 참에 비정규직법을 명문삼아 구조조정을 실시했다"고 말했다.

C부품주식회사도 지난 6월30일 고용기간 2년이 된 비정규직 근로자 10명의 계약을 해지했다. 회사는 대체 인력을 충원하지 않을 계획이다. 법 시행으로 비정규직을 쓰는 게 골치 아파진 데다 수주 물량도 줄어서다.

◇법 취지대로 정규직 전환=해고 사례만 있는 것은 아니다. 서울시 금천구의 바이오벤처 C사는 지난달 구매 및 통관업무 등을 해오던 비정규직 근로자 3명을 정규직으로 전환했다.



여기엔 출산휴가를 간 직원 대신 임시 채용했던 근로자 1명이 포함됐다. 회사 관계자는 "전문성이 필요한 일이 아니라 비정규직을 쓰고 있다가 이번에 정규직으로 전환했다"며 "회사가 커질 것을 생각해 3명 모두 전환했다"고 말했다.

한 중소업체 인사담당자는 "중소기업, 특히 제조업은 '해고 또는 정규직 전환'이라는 정석 보다 변칙적 방식으로 숙련 노동자 고용을 유지한다"고 설명했다. 반면 "금융권이나 대기업은 핵심 인력은 정규직으로 전환한 데가 많고, 정규직으로 할 필요가 없다면 내보내는 식으로 대응한다"고 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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