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정규직' 이름부터 바꾸자

최남수 MTN 보도본부장 2009.06.24 15: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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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TN 세상 그리고 우리는]

한국은 명함이 중시되는 타이틀 사회입니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에 실제 모습에 관계 없이 직업군마다 사회적으로, 경험적으로 합의된 의미가 부여됩니다. 예컨대 교수하면 실제 학문적 실적이 어떤 지에 관계가 없이 대부분 존경의 대상이 됩니다.

스승을 존중하는 유교적 전통의 탓이겠지요. 하지만 지속적으로 훌륭한 논문을 발표하는 등 학문적 성과가 크지 않으면 제대로 된 평가를 받지 못하는 선진국 사회와는 상황이 판이합니다. 변호사는 어떻습니까? 사실상 상업적 법률 서비스를 제공하는 전문 직업이지만 우리 사회에서는 정의롭다든가 하는 상징적 의미가 부여됩니다.





그러다 보니 우리 사회에서는 간판이 중시됩니다. 그래서 직업의 이름을 가볍게 넘겨 버릴 수 없습니다. 이름 하나로 그 직업에 대한 사람들의 생각이 바뀌기 때문입니다. 환경미화원, 욕실원 등 같은 새 이름도 이런 배경에서 생겨났고 이들 직업에 대한 사회적 인식에도 긍정적 변화가 생겼습니다.



요즘 비정규직 법을 둘러싼 논란이 정치권을 뜨겁게 달구고 있습니다. 여권은 대량 실업 사태를 막기 위해 비정규직의 고용 기간을 현행 2년에서 4년으로 늘리자는 입장입니다. 반면 야권은 본질적 해결책이 비정규직의 정규직 전환이라는 점을 들어 반대 입장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오늘 '세상 그리고 우리는'은 엇갈리는 이 두 개의 입장 중 어느 한편의 입장을 편들 의도는 없습니다. 여야가 비정규 근로자의 고용 안정을 위한 지혜로운 방안을 찾길 바랄 뿐입니다.

오늘 시청자 여러 분과 함께 생각해보고 싶은 것은 비본질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매우 중요한 이들 근로자에 대한 호칭의 문제입니다. 우리가 요즘 너무 당연하게 생각하는 비정규직이란 용어는 법률적, 행정적 용어가 전혀 아닙니다.


정확하게는 일정기간 동안 계약 형태로 근무한다는 의미에서 기간제 근로자로 부르는 게 맞습니다. 실제로 이들 근로자의 권익을 보호하기 위해 지난 2007년부터 시행된 법률 이름도 기간제 및 단시간 근로자보호 등에 관한 법률입니다. 법률 자체에 비정규라는 표현이 아예 없습니다.

비정규직이라는 용어 자체에 문제가 있습니다. 말 자체에 일종의 부정적, 차별적, 비하적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정규는 정상이고 비정규는 정상이 아니라는 식의 왜곡된 인식이 느껴지지요.

그런데 현실을 어떻습니까? 어느 회사를 들여다봐도 일정기간 회사와 계약을 맺고 일하는 근로자들이 이제는 되돌릴 수 없을 정도로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지난해 8월말 현재 통계를 한 번 볼까요? 전체 임금근로자 1610만 명 가운데 비정규직으로 불리는 기간제 근로자는 544만 명으로 약 34%를 차지하고 있습니다. 임금 근로자 3명 중 1명이 근로기간이 정해진 인력입니다. 그러니까 정규직이든 비정규직이든 모두 일반적인 근로 형태가 돼 있는 게 현실입니다. 근로계약의 형식만 다른 것이지요.

이런 면에서 저는 비정규직이란 용어 자체부터 바꿀 것을 제안합니다. 일부에서는 문제의 본질을 호도하기 위한 시도라고 비판하실 수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핵심을 들여다 보십시다. 앞에서 말씀 드린 대로 고용기간이 일정 기간으로 제한돼 있다는 사실만으로 정상이 아니라고 보는 게 오히려 비정상인 게 현실입니다.

저는 7년 전 미국의 한 투자은행에서 2달 간 일종의 견학 근무를 해본 적이 있습니다. 제가 놀란 점은 수시로 직원들이 회사를 그만두고 또 새 직원이 들어오고 회사 측도 성과가 나쁜 직원은 교체하는 등 회사와 직원들이 자유롭게 서로를 취사선택하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직원 전원이 우리 기준으로 보면 비정규직인 셈이지요.

물론 우리 현실하고는 달라도 매우 다른 얘기라고 느끼실 겁니다. 직장도 대접이 매우 좋다는 투자 은행이고요. 제가 이 회사의 예를 든 이유는 우리나라에서도 시간이 흐를수록 기간을 정해두고 일하는 고용형태가 선진국처럼 늘어날 것으로 보이기 때문입니다. 이를 감안하면 5백만 명이 넘는 이들 근로자의 인권 보호와 명예 회복을 위해 비정규직이란 이름이 바뀌어야 합니다. 기간제 근로자라든가 자유 근로자라든가 하는 식의 새 이름이 부쳐졌으면 합니다.

다만 지속적으로 논의가 필요한 부분은 기업들의 경쟁력을 훼손시키지 않으면서 이들 근로자의 처우 문제를 어떻게 개선해 나가고 상당 기간 한 회사에서 일한 근로자들을 기간 제한이 없는 고용으로 넘겨 줄 것인가 하는 점일 겁니다.

저는 이 방송을 준비하면서 비정규직이란 용어 사용의 문제점에 대해 노동부 관리와 대화를 나눠 보았습니다. 놀랍게도 이 관리 또한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사용해왔기 때문에 정부도 비정규직이란 말을 써온 것일 뿐 적절한 법률적 용어는 아니라는 점을 시인했습니다. 그렇다면 차제에 정부가 앞장 서 잘못된 용어를 고쳐 나가는 것이 바람직할 것입니다. 이름 하나 바꾸는 것만으로도 이미지가 크게 달라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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