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이 제시한 '존엄사' 허용 기준은

머니투데이 류철호 기자 2009.05.21 15: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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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21일 '존엄사(尊嚴死·소극적 안락사)'를 허용하는 판결을 내렸다.

이날 대법원 전원합의체는 식물인간 상태의 환자 김모(77·여)씨 자녀들이 생명연장 치료를 중단해 달라며 세브란스 병원을 상대로 낸 소송에서 "김씨로부터 인공호흡기를 제거하라"고 판결한 원심을 확정했다.

대법원이 존엄사를 허용한 기준은 △환자가 회생 가능성이 없고 사망 과정에 진입했다고 판단될 경우 △치료 중단을 원하는 환자의 의사(意思) △중단을 구하는 연명치료 행위 △의사(醫師)에 의한 치료 중단의 실행 등 크게 4가지다.



대법원은 우선 자기결정권 및 신뢰관계를 기초로 하는 의료계약의 본질에 비춰 강제진료를 받아야 하는 등의 특별한 사정이 없는 한 환자는 자유로이 의료계약을 해지할 수 있고(민법 제689조 제1항), 의료계약을 유지할 경우도 환자의 자기결정권이 보장되는 범위 내에서 진료행위의 내용 변경을 요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다만, 환자의 생명과 직결되는 진료행위를 중단할 것인지 여부는 생명권 존중의 헌법 이념과 사회상규에 비춰 극히 신중하게 판단해야 한다는 단서를 달았다.



또 의학적으로 환자의 의식이 돌아올 가능성이 없고 생명과 관련된 중요한 생체기능이 회복 불가능하며 짧은 시간 내에 사망에 이를 수 있음이 명백한 경우에 한해 '사망의 단계'로 평가해야 한다고 봤다.

이런 단계에 접어들면 이미 회복가능성을 잃어 더 이상 정상적인 삶을 기대할 수 없고 자연적으로는 이미 사망의 과정이 시작됐다고 볼 수 있어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신체 침해 행위에 해당하는 연명치료를 환자에게 강요하는 게 오히려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특히 이 같은 예외적인 상황에서 죽음을 맞으려는 환자의 의사결정을 존중해 환자의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 행복추구권을 보호하는 게 사회 상규에 부합되고 헌법정신에도 어긋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대법원은 이 경우 환자의 의사결정을 존중해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것이 허용되고 환자의 의사결정은 사전의료지시(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르렀을 경우에 대비해 미리 의료인에게 자신의 연명치료 거부 내지 중단에 관한 의사를 밝힌 경우)에 의해 이뤄질 수도 있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환자의 평소 가치관이나 신념 등에 비춰 연명치료를 중단하는 게 객관적으로 환자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인정되고 환자에게 자기결정권을 행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더라도 연명치료 중단을 선택했을 것이라고 볼 수 있는 경우 연명치료 중단에 관한 환자의 의사를 추정할 수 있다고 인정하는 것이 합리적이고 사회상규에 부합된다고 봤다.



이와 관련, 대법원은 사전의료지시는 진정한 자기결정권 행사로 볼 수 있을 정도의 요건을 갖춰야 하고 의사결정 능력이 있는 환자가 의료인으로부터 충분한 의학적 정보를 제공받은 후 그 정보를 바탕으로 자신의 가치관에 따라 진지하게 구체적인 진료행위에 관한 의사를 결정한 것이어야 한다며 존엄사 남용 가능성을 제한했다.

즉, 의사결정 내용이 환자 자신이 직접 작성한 서면이나 의료인이 환자를 진료하는 과정에서 의사결정 내용을 기재한 진료기록 등에 의해 명확하게 입증될 수 있어야 사전의료지시의 효력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또 환자의 의사를 추정할 때는 확인 가능한 자료를 모두 참고하고 환자가 평소 가족 등에게 밝힌 의사, 타인의 경우를 보고 환자가 보인 반응, 환자의 나이와 치료의 부작용, 환자가 고통을 겪을 가능성 등을 종합해 환자가 연명치료 중단을 선택했을 것이란 객관적인 근거가 뒷받침돼야 한다고 판시했다.



대법원은 이 같은 연명치료 중단의 허용 기준에 부합될 경우 반드시 소송절차를 거칠 필요 없이 치료중단이 허용된다고 밝혔다. 다만, 환자가 회복 불가능한 사망의 단계에 이르렀는지 여부에 관해서는 전문의 등으로 구성된 위원회의 판단을 거치는 게 바람직하다고 설명했다.

한편 김씨는 지난해 2월 서울 신촌 세브란스병원에서 폐 조직검사 도중 폐혈관이 터져 뇌가 손상된 뒤 식물인간 상태가 됐고 김씨의 가족들은 같은 해 5월 "무의미한 연명 치료 장치를 제거해 달라"며 소송을 냈다.

이에 서울서부지법은 같은 해 11월 사상 처음으로 존엄사를 인정하는 판결을 내렸고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고법도 지난 2월 1심과 같이 김씨 가족의 손을 들어준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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