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법원도 존엄사 허용..입법논의 탄력

머니투데이 최은미 기자 2009.05.21 15: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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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인간 상태인 환자의 무의미한 생명연장 치료를 중단하고 호흡기를 제거하라는 대법원의 최종판결은 품위있게 죽음을 맞이하고자 하는 개인의 자기결정권을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라는 점에서 의미있다.

재판부는 "환자에겐 진료 여부를 결정할 권한이 있다"며 "사망할 것이 명백할 경우 무의미한 치료 행위는 인간의 존엄을 해친다"고 밝혔다.



1심과 2심 역시 "회생 가능성이 없는 환자가 진지하게 연명 치료장치를 떼길 원하면 의료진이 그 뜻을 존중해야 한다"며 "현재의 절망적 상태나 기대여명기간, 현재 나이 등을 고려할 때 김씨는 인공호흡기를 제거하고 자연스러운 죽음을 맞이하고자 하는 의사를 갖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판시한 바 있다.

실제로 국립암센터가 지난해 9월 전국 만20~69세 성인 남녀 1006명을 대상으로 실시한 '품위있는 죽음에 대한 대국민 인식조사' 결과, 죽음이 임박한 환자에게 의학적으로 무의미한 생명연장치료를 중단하고 자연스럽게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존엄사'에 대해 응답자의 87.5%가 찬성했다.



이처럼 대국민 인식이 변화한 데에는 치료가 불가능한 환자들이 임종 직전까지 의미없는 치료를 받느라 신체적, 경제적으로 고통받고 있는 현실이 자리잡고 있다.

허대석 서울대병원 혈액종양내과 교수가 일본임상암학회지 2008년 4월호에 발표한 연구결과에 따르면 전이성암으로 진단받고 항암제치료를 받은 국내 환자 298명을 사망할 때까지 추적관찰해 분석한 결과 대부분이 임종 직전까지 응급실을 전전하며 항암치료를 받고 있었다.

허 교수에 따르면 임종 직전 1개월 동안 대형종합병원 응급실을 방문한 말기암 환자는 33.6%로 9.2%인 미국에 비해 3배 가량 높았다. 절반에 달하는 50.3%의 환자는 임종 두달 전까지 적극적인 항암치료를 받았으며, 2.7%의 환자는 임종 한달 전까지 중환자실에서 생명연장치료를 받았다.


이로인한 비용도 만만치 않았다. 국립암센터 '말기 암환자 의료비 지출실태 분석자료'에 따르면 암 환자가 사망 1년 전부터 사망때까지 치료비 등 직·간접적으로 사용하는 비용은 평균 2780만여 원에 이른다. 특히 마지막 한 달 동안 전체 비용의 36.3%를 쓰는 것으로 나타났다.

국립암센터 측은 "사망 직전 한 달 동안 비용이 급증하는 것은 대부분 불필요한 의료이용 탓"이라며 "이런 비용 마련을 위해 해마다 3만여 가구가 그동안 모아둔 저축의 대부분을 쓰고 집을 줄여가고 있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의료계는 임종이 임박한 환자들이 인생의 마지막 순간을 잘 정리하고 의미있게 보낼 수 있도록 정부가 나서야 한다고 주장한다. 병원 자체적으로 가이드라인을 만들어 인간답게 죽을 수 있는 권리를 지켜주자는 시도도 일어나고 있다.

서울대병원은 지난 19일 말기 암환자의 경우 환자 본인이 사전에 생명연장치료를 받을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사전의료지시서'를 의료윤리위원회에서 통과시키는 등 존엄사 제도화에 앞장서고 있다. 지난 15일부터 시작된 사전의료지시서 서명에는 현재까지 암환자 2명이 모든 생명연장치료를 거부한다는 내용으로 참여했다.

세브란스병원도 이번 사건을 겪으며 자체적으로 존엄사 가이드라인을 만든 것으로 확인됐다.



가이드라인은 △뇌사 환자나 △여러 장기가 손상된 환자 등 죽음이 임박한 상태의 환자를 1단계, 이번 소송 대상이 된 △식물인간 상태로 인공호흡기에 의존해 살아가고 있는 환자를 2단계, △식물인간 상태지만 호흡이 스스로 가능한 환자를 3단계로 구분하고 있다.

병원 측은 1단계 환자의 경우 환자가족의 동의가 있고, 자체 윤리위원회에서 통과되면 생명연장 치료를 하지 않을 계획이다. 2단계 환자는 본인 또는 대리인이 작성한 사전의사결정서와 함께 가족의 동의 여부를 확인하는 절차를 밟은 후 병원 윤리위원회에서 통과되면 최종적으로 존엄사를 시행할 예정이다.

3단계 환자에 대한 연명치료 중단은 너무 성급한 만큼 앞으로 사회적, 법률적 합의가 이뤄진 후 세부적인 지침을 마련한다는 계획이다.



대법원 판결까지 나온 만큼 국회에서 하루빨리 존엄사 관련법을 만들어 일선병원이 혼란을 겪지 않도록 '교통정리'를 해야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대법원 역시 유사사례를 법원에서 일일이 판단하는 것은 현실적이지 못한 만큼 입법기관이 법적 근거를 마련해야한다고 지적한 항소심 재판부의 주장을 유지했다.

대한의사협회는 "생명연장치료 중단 요건과 의사의 의학적 판단 인정범위 등을 규정한 법적 제도적 뒷받침이 필요하다"며 "사회적 합의를 통해 하루빨리 구체화된 제도적 장치가 마련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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