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화문] '금융수출' 일꾼을 키우자

머니투데이 정희경 부국장대우 겸 금융부장 2009.05.13 07: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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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유성 산업은행장은 얼마전 끝자리 번호가 '2020'인 휴대폰을 새로 장만했다. 1년여 진통을 거듭해온 산은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한 직후였다. 2020년까지 산은을 글로벌 투자은행(CIB)업계 20위권에 진입시키겠다는 목표에서다.

산은이 이 비전을 달성하는 데는 민 행장뿐만 아니라 기획재정부 장관이나 금융위원장도 '2020'을 공유하는 게 무엇보다 필요하다. 산은 임직원이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더라도 한동안 대주주 지위를 유지하게 될 정부의 행보에 따라 2020년 산은의 모습은 지금의 구상에서 한참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산은이 목표로 삼은 상업은행 중심의 CIB는 최근 글로벌 금융위기를 버텨낼 만큼 견고한 '성'이다. 산은으로서는 수신기반 확충과 기업금융 제고라는 두 마리 토끼를 쫓으면서, 그 역량도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넘볼 수 있는 영역이다.

항간의 우려대로 '정부의 실패'가 나타난다면 산은이 글로벌 금융회사와 경쟁을 해보기는커녕 시중은행의 영역만 침범하는 정체 불명의 금융기관으로 전락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산은법 개정안의 국회 통과는 그 자체로 힘겨운 과정이었지만 민영화라는 대장정의 첫발을 내디딘 것에 불과하다. 법상 산은의 민영화 완료시점은 2014년이다. 다음 달부터 5년 이내에 지주회사 지분을 매각해야 하는데, 지배구조 구축이나 보유 기업 지분 정리 등에서 적잖은 잡음이 나올 여지가 충분히 있다. 어느 것 하나 만만치 않은 과제여서 세밀한 실행계획과 흔들림 없는 추진력이 전제돼야 한다.

물론 정부의 의지는 아직까지 각별해 보인다. 금융위원회에 따르면 정부는 산은에 대해 업무계획 승인제도 폐지 등 규제를 완화하고, 국내외 금융시장에서 추가적인 인수·합병(M&A)을 통해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다는 방침이다. 또한 인센티브 보상을 활용해 우수인력을 확보하면서 정부는 보유자산 관리 차원에서 이사회에 참여해 민영화 과정을 모니터링하는 지배구조를 만들기로 했다.

하지만 이는 '미실현' 약속 단계다. 앞서 민영화 대상에 이름을 올리고도 시장상황이나 경제여건에 흔들리는 정부로 인해 혼선을 경험한 우리금융 등의 사례가 기억에 생생하다.


선의의 관리자를 자처하는 정부가 예기치 못한 위기에 직면하거나 정책적인 고려에서 '감 놔라, 배 놔라' 하는 식으로 돌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산은 못지 않게 정부도 '초심'을 잃지 않도록 로드맵을 잘 그려놓아야 한다.

또 한가지 잊지 말아야 할 점은 기업금융의 노하우를 축적한 정책금융기관을 민영화하는 게 한국 만이 아니라는 것이다. 중국은 지난해 2월 산은 격인 국가개발은행(CDB) 상업화에 착수했고, 일본은 2007년 7월 정책투자은행(DBJ)의 민영화를 위해 '주식회사일본정책투자은행법'을 제정했다.



점차 커지는 동아시아 지역의 투자은행 시장을 놓고 한·중·일 3국이 경합을 벌이는 형세다. 금융삼국지는 아시아 사회간접자본(SOC) 투자가 이번 금융위기 이후 크게 늘어날 수 있다는 전망과도 맞물려 있다.

국내 SOC 관련 프로젝트파이낸싱(PF) 주선에서 부동의 1위를 차지하는 산은이 CIB로 신속히 업그레이드된다면 금융수출의 길은 한결 쉽게 열린다. 산은은 이미 아·태지역에서 PF 주선 2위를 달리고 있다. 산은을 통해 국내금융이 해외로 나가면 그 수혜는 기업들에 돌아간다.

이 기회가 일본이나 중국에 넘어간다면 곤란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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