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HO 뭐했나?"…'신종 플루' 늑장대응 비난

머니투데이 이규창 기자 2009.05.03 1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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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시코에서 첫 발견된 신종 플루(인플루엔자A·H1N1)에 대한 세계보건기구(WHO)의 '늑장 대응'이 비난을 받고 있다.

신종 플루가 전염병 경보 수준 최종 단계인 6단계 진입을 목전에 두고 있지만, WHO가 신종 플루의 발병을 인정하고 공식 대응에 나선 것은 최초 '미확인 질병'이 보고된 지 2주반이나 지나서였다.

◇WHO, 신종 플루 출현 18일 만에 첫 대응
질병 조사회사 베라텍트는 지난달 6일 멕시코 베라크루즈 주정부가 400명의 환자가 발생해 '보건 경보'를 선포한 사실을 알렸지만, WHO의 대응은 무려 18일이 걸렸다.



멕시코 국립역학센터 소장인 미구엘 레사나 박사는 지난 16일 이상 징후를 공식 확인해 WHO의 지역 산하 기관인 팬아메리칸 보건기구(PAHO)에 통보했지만, WHO의 대응이 너무 늦었다고 비난했다.

WHO는 신종 플루의 전염병 경보 단계를 비교적 위험이 적은 '3단계'로 방치했다가 25일 인체간 전염 위험이 높은 '4단계'로 올렸고, 29일에서야 전세계적 유행이 임박한 '5단계'로 격상시켰다.



전염병 확산을 막아야 할 WHO의 늑장 대응이 멕시코에서 북미 전역, 아시아와 유럽까지 광범위하게 신종 플루가 번지게 한 요인이라는 비난을 피하기 어렵다.

게다가 28일 WHO는 이미 질병이 광범위하게 확산된 시점에서 예방은 의미가 없고 사태 진정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면서, 실효성이 없는 국경 통제나 여행 제한 조치를 하지 말 것을 각국 정부에 권고했다.

늑장대응 뒤에서야 나온 이런 '권고'는 유명무실했고 중국 등 각국은 북미산 생돼지, 돼지고기 수입을 전명 중단하는 사태가 벌어졌다.


일본 등 각국의 전염병 비상 대응 단계에 따르면, WHO의 전염병 경보 단계가 '5단계'로 상향될 경우 공항폐쇄 등의 조치가 뒤따른다. 따라서 WHO가 전염병 경보 단계를 뒤늦게 조정하고 현실적으로 맞지 않는 권고를 하는 등 대응이 안일했다는 지적이다.

◇"국제 경보시스템 실패"…경보 단계도 '한 발 늦어'
영국 유력지 인디펜던스는 3일 "전염병 경보 시스템이 신종 플루 확산을 막는 데 실패했다"면서 WHO의 늑장대응을 비판했다.

WHO는 지난 2005년 193개 회원국이 도입한 국제보건규칙(IHR)을 개정해 2007년 7월부터 각국 정부가 '비정상적이거나 예기치 않은' 질병이 출현할 경우 24시간 이내에 WHO에 보고하도록 의무화했다.

보고를 받은 WHO 및 관련 기관은 48시간 이내에 '심각한 공중보건상 영향'이 있을지 조사해 확산 방지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중국이 2002년 SARS의 전염 사실을 은폐하려다 사태가 악화됐던 전례로 인해 도입된 국제 전염병 경보 시스템에 커다란 구멍이 뚫려있었던 셈이다.

◇H1N1 바이러스엔 대비책 '無'…5000만명 사망 스페인독감 잊었나
WHO는 다른 문제점들도 드러냈다. 그동안 WHO는 만약 신종 플루가 출현하게 된다면 조류독감의 일종인 'H5N1' 바이러스가 원인이 될 것이라고 보고, 백신 연구와 대책 마련에서 'H1N1' 바이러스는 뒷전으로 치부했다.

일본 등 세계 보건당국이 비축하고 있는 백신은 대부분 신종 플루와 무관한 H5N1형 바이러스용으로, 부랴부랴 H1N1용을 구하느라 분주한 상태다.

예를 들어 1997년 홍콩에서 발생해 치사율 60%를 기록했던 조류독감은 H5N1형 바이러스가 원인이었지만 감염자가 500명 이내로 확산에 따른 피해는 적었다.

그러나 H1N1형 바이러스가 원인이었던 1918년 스페인독감은 초기엔 증상이 비교적 경미했지만 4개월 뒤 전세계로 빠르게 확산되고 파괴력도 커지면서 5000만명의 사망자를 냈다. 이는 세계 1차 대전 사망자를 웃도는 숫자다.

이 때문에 초기 확산 방지에 주력해야 할 WHO가 안일하게 대응한 것이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고 있다.

◇신종플루 명칭 논란…WHO '무기력증'
국제통화기금(IMF)이 오랜 기간 미국과 유럽에 휘둘리면서 선진국들의 입장을 대변하는 유명무실한 기관으로 전락했다가 최근 금융위기가 터지고 나서야 위상 정립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처럼, WHO의 '무기력증'도 도마에 올랐다.

신종 플루의 명칭을 결정하는 문제에서 스미스필드 푸드 등 미국의 농축산 대기업들의 로비가 작용하면서 '돼지 인플루엔자'를 '인플루엔자A'라는 유래없는 명칭으로 바꿔놨다는 지적도 제기됐다.

초기에 WHO는 '돼지 인플루엔자'(swine influenza)라는 명칭을 사용했지만 미국 돈육협회(NPPC) 등 이익집단과 연관된 학자들 사이에서 "명칭이 적절치 않다"면서 개명 논란이 제기됐다.

1998년 미국산 돼지에서 발견된 H1N1 바이러스가 조류독감과 인간독감 바이러스 인자와 섞이면서 꾸준히 진화해온 결과물이 최근 출현한 신종 플루다. 이 때문에 미국 질병통제센터(CDC)도 초기에 '돼지 인플루엔자'라는 명칭을 사용했다.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여전히 다수 학자들은 '돼지 인플루엔자'라는 명칭에 동의하고 있다"면서 "플루 바이러스는 처음 발견된 동물의 종류에 따라 명칭을 부여하는 것이 일반적이며 'H1N1' 바이러스는 돼지에서 처음 발견됐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미네소타대학 전염병연구소의 마이클 오스터홀름 교수는 "바이러스의 대부분 물질은 돼지에서 온 것"이라면서 H1N1의 변형 바이러스로 인한 플루가 '돼지 인플루엔자'가 아니라는 주장을 반박했다.

축산 업계의 꾸준한 로비 이후 WHO는 지난달 30일 신종 플루가 돼지로부터 전염된다는 불필요한 오해를 막기 위해 '돼지 인플루엔자'의 명칭을 '인플루엔자A(H1N1)'로 변경한다고 공식 발표했다.

그러나 학계의 비판을 감수한 이 결정은 이미 축산업계가 심각한 타격을 받은 뒤에야 나왔고, 또 하나의 오락가락, 늑장 대응의 사례로 남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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